文史哲

阮堂 歲寒圖 (완당 세한도)

慈尼 Johnny 2013. 8. 2. 05:59

 

阮堂 歲寒圖

 

      (완당 세한도 - 추사 김정희)    

 

紙本 墨書  23.3 * 108.3센티,국보 제180호>

 

 

세한도.JPG
완당 세한도 - 阮堂 歲寒圖 국보 180호 / 산수화

    지정번호: 국보 제180호

    지정연월일: 1974년 12월 31일

    시대 :조선 헌종 10년(1844)
    규모·양식: 세로 23㎝ 가로 69.2㎝ 횡축

    재 료: 종이 바탕에 수묵
    소유자: 손창근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52-109

     
      완당 세한도는 조선 말기의 사대부 서화가 완당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수묵으로만 간략하게 그린

    사의체(寫意體)의 문인화이다.


      1840년 윤상도(尹尙道) 사건에 연루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 온 김정희에게 사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두 차례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려 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작가의 발문이 화면 끝부분에 붙어 있으며,

    이어서 이 그림을 받고 감격한 이상적의 글이 적혀있다.

    그리고 1845년 이상적이 북경에 가서 그 곳 명사

    장악진(章岳鎭)ㆍ조진조(趙振祚) 등 16명에게 보이고 받은

    찬시와 함께 김석준(金奭準)의 글과 오세창(吳世昌)ㆍ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拜觀記)가 붙어 있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 '세한도'라는 화제와 우선(藕船) 이상적이 완상하라는

    '우선시상(藕船是賞)'과 '완당'이란 관지(款識)가 적혀있고,

    '정희(正喜)'와 '완당'이라는 도인(陶印)이 찍혀 있다.

     

    그림 자체는 단색조의 수묵과 까칠한 마른 붓질과 고담한 필선의

    감각만으로 이루어졌다.

      옆으로 긴 화면에는 집 한 채와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대칭을 이루며

    지극히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텅 빈 여백으로 남아있다.

    이와 같이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요소들은

    모두 문인화의 특징으로, 직업 화가들의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를

    부정하는 작가의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라 하겠다.

     

      자연의 근원적인 창생력과 합일된 작가의 농축된 마음에서 표출된 필선과

    먹빛에 의해 조성된 담박하면서도 고졸한 분위기는

    문기(文氣) 또는 문자향을 비롯하여 문인화가 지향했던 형식보다는
    내용과 정신을 중요시하는 경향과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극치를 보여준다.

     

    조선 말기를 풍미하였던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집약된 경지와 함께

    조선시대 문인화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추사 김정희 초상 (허필련 작)

     

     

    1. 그림이 그려진 배경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자 그 간 그와 왕래하던 사람들 중 거의 모두는 발길을 끊게되었으나 그의 제자 이상적<李尙迪. 호는 우선 藕船. 당시 온양군수>만은 꾸준히 스승을 위하여 책을 구해 보내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추사의 유배 5년째인 1844년 추사는 우선<藕船>을 위하여 이 그림을 그렸는데 이 때 그의 나이 59세였다.

     

    2.李尙迪<1804- 1865>
    호 藕船  추사의 역관출신 제자로서 북경에 여러차례 왕래하였으며 시문에 능하여 중국의 문사들과 교류가 깊었다. 저서에 은송당집<恩誦堂集>과 해린척소<海隣尺素>가 있다.

     

    3.화풍<畵風>
    세한도는 그림이기 이전에 그의 암울하고 쓸쓸한 유배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심경사진<心境寫眞>이다. 자신의 말할 수 없이 처절한 심정은 볼품없는 조그마한 집 한채로서 표현하였고 제자의 고마운 행동은 지조의 상징인 우뚝한 소나무로 표현하였으며 "너와 나"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무관심은 소나무와 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겨울배경으로 표현하였다.

    표현주의적 기법이며  필의가 간결하고 풍격이 높아 종래의 남종화<南宗畵>를 일신하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신남종문인화<新南宗文人畵>이다.

     

    4.제기<題記>

     

     

     

     

    제기<題記>는 소해<小楷>이지만 隸의 필의가 들어있으며 갈필을 많이 구사하였다.

    추사는 24세에 중국 연경에 들어가 많은 금석학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 중 가장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학자는 옹방강<翁方綱>이었고 귀국 후 한 동안 그는 옹방강의 글씨를 많이 썼다. 그러나 글씨의 원천적인 힘은 篆,隸에 기인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집중적으로 예서를 탐닉하게된다.이후 西漢의 隸書에서 얻은 강철 같은 힘은 해서,행서,초서에도 응용되었다.

    그러던 중 유배생활과 더불어 그의 글씨가 일변하게되는데 그가 만일 평안한 생활로 일관했다면 글씨가 변하여도 이렇게 변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유배 10년이란 세월이 본인으로서는 지극히 불행한 일이었겠으나 지금의 후학들로 보면 오히려 조선 제1의 서학자를 내기 위한 하늘의 뜻이 아니었나 생각도 해본다.

     

    5.인영(印影>
    3개의 인영은 추사가 직접 찍은 것으로서 동일한 인영이 오세창의 근역인수(槿域印藪>에도 보이나 長毋相忘<?>으로 보이는 인영은 사진이 흐려 정확한 식별이 어렵고, 이 세한도가 일인<日人>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 소장자가 찍은 것 아닌가 의심이 가지만 좀더 연구해볼 과제이다.

    秋史

    正喜

    長毋相忘

    阮堂

    秋史 阮堂 正喜의 3개 인영은 세한도의 것은 흐리므로 근역인수에서 복사함.


    6. 소장자
    처음에는 우선<
    藕船> 이상적<李尙迪>에게 그려준 것이므로 우선이 소장하여을 것이며 이후  전전하여 일본인학자 藤塚隣박사가 소장하게 되었다. 이를 孫在馨씨가 일본으로 건너가 재차 구입해들여 현재는 개인이 소장 중이며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있다.

     

     

    7, 세한도 제기 <題記>문장풀이

     

    歲  寒  圖 ( 추운 날씨를 그린 그림 )

    藕船是賞 阮堂藕船是賞 阮堂
    藕船 (제자인 이상적)에게 그려 줌. 완당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上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지난 해에 두 가지 晩學,大雲 책을 부쳐왔고, 금년에는 藕耕文編이라는 책을 부쳐왔는데,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요.

    머나먼 천리 밖에서 구한 것이며, 여러 해를 거쳐 얻은 것이요, 일시적인 일이 아니다.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더구나, 세상의 도도한 물결은 오직 권세와 이익의 옳음만을 따르는데, 그것을 위하여 마음을 소비하고 힘을 소비함이 이와 같아, 

    권력 있는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밖의 한 초췌하고 메마른 사람에게 주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는 것과 같구나.

    <세상사람이 권력자를 추구하듯 나를 따라주는구나>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 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교분이 성글어진다고 하였는데, 그대 또한 세상의 물결 속의

    한 사람으로 초연히 스스로 도도한 물결에서 (몸을) 빼어 권세와 이익의 밖에 있으니 나를 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써 하지

    않는 것인가? 태사공의 말이 그른 것인가?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이후라야 소나무와 잦나무 <또는 측백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 고 하였다.

    松栢은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이다. 성인이 특히

    세한의 후에 그 것을 칭찬하였는데, 지금 그대는 전이라고 더함이 없고, 후라고 덜함이 없구나.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거니와,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 아닌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다만 늦게 시드는 정조와 경절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고 또한 세한의 시절에 느끼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비<丕+邑>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아! 西漢의 순박한 세상에 급암, 정당시 같은 어진 이에게도 빈객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곤 하였으며,

    하비의 방문같은 것은 박절이 극에 달하였구나. 슬프다!  완당노인 쓰다

     

    <참고 : 추사고택 에서 배포하는 자료를 참고로 한, 마지막 구문의 풀이문>
    아! 서한의 순박한 세상에 급암,정당시 같은 어진 이에게도 빈객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곤 하였고, 이는 하규(下규)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을 붙여 "一死一生에 사귀는 정을 알겠고, 一貧一富에 사귀는 모습을 알겠으며, 一貴一賤ㅡ으로도  곧 사귀는 정을 알 수 있겠노라" 고 하였던 고사에서도 같은 것이었으니, 이렇듯 세상 인심의 절박함이 극에 도달한 것은 참  슬픈 일이로구나.  

    완당노인 쓰다.

     

    제자 이상적 은 스승의 <세한도>를 받아보고 곧 다음과 같은 답장을 올렸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진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 스스로 하지 않으려야 아니 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서책은, 비유컨대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권세와는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使行) 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들어가 표구를 해서 옛 지기(知己) 분들께 두루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하고자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를 벗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득을 초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당하신 말씀입니다.

    출처는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pp.152~163

     

     

    藕 - 연뿌리 우  연 우
    阮 - 나라이름 완
    비<丕+邑> - 땅이름비  클비(丕와 같음)
    勁 - 굳셀 경
    滔 - 물넘칠 도     넓을 도

    大雲 --------- 운<心+軍>敬의 大雲山房集
    晩學 --------- 桂馥의 晩學集
    藕耕文編 ----- 賀藕耕의 皇朝經世文編. 120권
    太史公 ------- 司馬遷 또는 그의 부친인 司馬談
    西京 --------- 옛 한<漢>의 수도인 장안<長安>
    汲암<黑+音> -
    漢의 忠諫을 잘하던 신하<BC ? - BC112>
    鄭當時 -------
    漢의 진<陳>사람으로서 의로움으로 이름을 떨침
    下규<圭+邑> - 지금의 陝西省渭南縣
    下비<不+邑> - 지금의 江蘇省 비縣內
    榜門 --------  책공서문<翟公書門> 참조

     

    翟公書門 <책공서문  *翟--꿩적.깃옷 적  고을이름 책>

    前漢 7대 황제인 武帝 때 汲 과 鄭當詩라는 두 賢臣이 있었다. 그들은 한때 각기 九卿(9개 부처의 각 으뜸 벼슬)의

    지위에까지 오른 적도 있었지만 둘 다 개성이 강한 탓에 左遷·免職 재등용을 되풀이하다가 급암은 淮陽太守를

    끝으로 벼슬을 마쳤다. 이들이 각기 현직에 있을 때에는 방문객이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나 면직되자 방문객의 발

    길이 뚝 끊어졌다고 한다. 사마천의 《史記》〈汲鄭列傳〉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저 급암과 정당시의 어짊이라도 권세가 있으면 賓客이 열 배가 되고, 권세가 없으면 그렇지 않다.

    하물며 보통 사람임에랴?"

     

    하규(下<圭+고을읍>)의 翟公(책공)이 말하기를 "비로소 책공이 廷尉가 되자 빈객이 문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그가 면직되자 집 안팎이 어찌나 한산한지 '문 앞(밖)에 새 그물을 쳐 놓을 수 있을 정도(門外可設雀羅)였다.

    얼마 후 책공은 다시 정위가 되었다. 빈객들이 교제하려 하였는 데 책공이 이에 문에 다음과 같이 크게 써서 붙였다.

    一死一生 乃知交情
    일사일생 즉지교정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사귐의 정을 알고

    一貧一富 乃知交態
    일빈일부 즉지교태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함에 사귐의 태도를 알며

    一貴一賤 乃見交情
    일귀일천 즉현교정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곧 사귐의 정은 나타나네

     

    之의 용법 <부분은 불확실한 부분임>

    此皆非世之常有

    ∼의(소유격)                         ★

    購之千萬里之遠

    그것을(목적어)                      ★

    積有年而得之

    그것을(목적어)

    非一時之事也

    ∼의(소유격)

    且世之滔滔

    ∼의(소유격)

    惟權利之是趨

    ∼의(소유격)

    爲之費心費力如此

    ∼그것을(목적어)

    而不以歸之權利

    ∼그것을(목적어)                 ★

    乃歸之

    ∼그것을(목적어)                 ★

    海外蕉萃枯稿之人

    ∼한(형용사형)

    如世之趨權利者

    ∼이(주격)

    君亦世之滔滔中一人

    ∼의(소유격)

    其有超然自拔於滔滔
    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의(소유격)

    太史公之言非耶

    ∼의(소유격)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그것을(목적어)

    今君之於我

    ∼가(주격)                            ★

    然由前之君 無可稱

    ∼의(소유격)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의(소유격)

    聖人之特稱

    ∼이(주격)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의(소유격) 또는 ∼하는(형용사형)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의(소유격)

    烏乎 西京淳厚之世

    ∼의(소유격) 또는 ∼하는(형용사형)

    以汲鄭之賢

    ∼의(소유격)

    賓客與之盛衰

    ※ 큰 의미 없는 어기사.              ★

    如下 榜門 迫切之極矣

    ∼이(주격)

     

    세한도 작품에서 之자의 모양이 다른 이유.

    <1> 서예는 문자 예술이다. 그러므로 단순하고 생경한 것들은 격이 낮은 것으로 친다. 특히 문자는 모양이 규칙적이어서

    같은 문자를 늘어놓을 경우에 무미건조해지기 쉬운 것이다. 따라서  조형성을 확보하고 단순함을 피하기 위하여 같은 글자도

    획의 短長이나 선의 굵기, 直曲의 변화, 그리고 획의 생략이나 추가를 하게 되는 것이다.

    <2> 이는 역사적으로 한자가 다음과 같이 변화를 거치면서 다양한 모양을 가진 것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陶文 - 甲骨文 - 鐘鼎文(金文) - 小篆 - 隸書 - 楷書 - 行書 - 草書
                                          |                    |
                                          +------(章草)--------+
    <3> 또한 글자 획의 변화는 붓이라는 서사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8. 참고자료

     

    <1> 세한도 ( 歲寒圖 )

    사가 제주도에서 유배 중이던 1844년(헌종 10),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변함없이 지극함에 감동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이러한 사연은 그림의 왼편에 쓰여있는 추사의 발문(跋文)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추사는 발문에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논어(論語)」자한편(子罕篇)의 글귀를 인용하여 권력과 이익에 좌우되는 세상인심과, 그 가운데서도 스승을

    잊지 않고 중국에서 구한 귀한 서책을 멀리 귀양간 스승에게 보낸 이상적의 마음 씀씀이를 칭찬하였다.

     

    또한 논어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구절은 특히‘세한(歲寒)’이라는 시기를 강조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고적하고 어려운 자신의 유배생활을 세한(歲寒)에 비유하고, 송백(松柏)과 같은 기상을 잃지 않으려는 자신의 굳센

    의지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넓은 공간에 자그마한 집과 아름드리 송백만이 매우 간략하게 그려져 있어 추운 시절의 황량한 느낌이 잘 나타나 있다. 삼각형의 안정된 구도 속에 꼿꼿하고 굳센 필치와 메마르고 차가운 먹색이 어우러져 고고(孤高)한 문기(文氣)를 강렬하게 발산하고 있다.

    이상적은 중국어 역관(譯官)으로 십 여차례 중국을 드나들며, 스승의 소개로 중국의 명망있는 문사(文士)들과 깊이 교유하였다.

    추사에게서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이듬해 다시 중국 북경에 가게 되었고 옛 친구인 오찬(吳贊)의 잔치에서 세한도를 내보였다. 이 때 자리를 함께 했던 청나라 문사 16인은 이 그림을 감상하고는 세한도의 높은 품격과 사제간의 깊은 정에 감격하여 저마다

    이를 기리는 시문(詩文)을 남겼다.

    현재 세한도의 두루마리에는 그림 뒤쪽에 이들의 시문이 모두 붙어 있으며, 이외에도 김준학(金準學),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정인보(鄭寅普, 1892∼?)의 찬문(讚文)도 포함되어 있다.

     

    <2>유자가교(孺子可敎 )

    젊은이는 가르칠 만하다는 것으로, 열심히 공부하려는 아이를 칭찬하는 말이다.   

    한(漢)나라 장량(張良)의 조상은 3대째 한(漢)나라의 재상을 지냈으나 6국이 진(秦)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부터는 상황이 달랐다.  장량은 본래 회양(淮陽) 지방에서 예제(禮制)를 배우다가 조국인 한나라를 위해 복수하고자 가산을 정리하고 회양에서 힘을 쓰는 장사 한 사람을 사서 진시황을 죽이라고 시켰다.

    때마침 진시황제가 박랑사(博浪沙)를 순시하러 왔다. 장사는 120근이나 되는 철퇴로 시황제를 공격하려다가 호위병을 치고는 붙들려 결국 장량의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하였다. 그러자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졌고, 장량은 이름을 바꾸고 하비로 가서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어느 날 장량이 하비교로 산보를 갔는데, 한 노인이 장량의 맞은 편에서 걸어오더니 일부러 신발 한 짝을 다리 밑으로 떨어뜨리고서 주워 달라고 했다.장량은 내심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범상치 않은 노인임을 알고는 신발을 주워다가 주었다.

     

    그러자 노인은 장량에게 발을 내밀어 신발을 신기라고 하였다. 장량은 무릎을 꿇고는 신을 신겨 주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노인은 빙그레 웃더니 말없이 가버렸다.  

    장량은 다리 위에서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는데, 그 노인이 다시 돌아와서 장량에게‘유자가교(孺子可敎)’라는 말을 하고는 닷새 후 아침에 다리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훌쩍 가버렸다. 장량은 갑작스런 노인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후 장량이 날이 밝자마자 다리 위로 나가니 노인은 벌써 나와 기다리면서 몹시 화를 냈다. 그리고는 내일 다시 나오라고 말하고 가버렸다. 그 다음날 장량은 새벽에 다리로 나왔다. 그러나 노인이 먼저 나와 기다렸다. 사흘째 되는 날에도

    장량보다 먼저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은 장량에게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며 욕을 하곤 그에게 닷새 후에 다시

    나오라고 했다.

    장량은 노인이 말한 날 캄캄한 새벽에 다리 위로 갔는데 노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가 한참 동안 기다리자 노인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그는 기뻐하며 장량에게 책 한 권을 주고는 10년 후에 제북(齊北)의 곡성산 (穀城山) 아래로 와서

    그를 찾으라고 하였다.  

    그 책은 강태공의 병법이었으며 노인은 바로 황석공(黃石公)이었다. 그 후 장량은 그 책을 공부하여 유방의 모사가 되었고,

    결국 한나라를 개국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세한도 의 발자취 

     

         이상적 이 소장해 나라 안팎의 명사들이 두루 감상했던 세한도는 백여 년의 세월동안 어떻게 전해져 왔는지는 알 수가 없고,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된 것은 1945년 이전 당시 경성제국대학의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1879-1948)에

    의해서다.

        후지즈카 는 북경의 한 골동상 에서 우연히 세한도 를 만났는데 그림을 본 순간 전율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운 좋게 그림을 입수하고는 틈만 나면 세한도를 들여다보며 살았다. 그러다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문학박사 학위를 청구하면서 발표한 논문은 '이조에 있어서 청조문화의 이입과 김완당' 이었다.

    그가 얼마나 김정희의 작품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나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지자 후지즈카 는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들어갔다.

    세한도가 이 땅에서 사라질 운명에 놓인 것이다.

     

        이 그림이 다시 고국에 돌아오게 된 것은 소전 손재형(1903-1981) 이란 한 사람의 끈질긴 집념에 의해서이다.

    손재형은 일제 때부터 고서화의 대수장가며 대감식가 로 고서화에 관해서는 당대 최고 중의 한 명이다.

    전남 진도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는 조선미전 에 특선으로 입상할 정도로 그림과 서예에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다. 효자동의 멋진 한옥집에서 살았고, 사랑방과 대청 벽에는 뛰어난 고서화를 걸어 놓고 감상하며

    특히 김정희의 작품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이다.

        일제강점기 때 청자 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거금에 거래되었으나 고서화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겸재 정선의 화첩까지 부잣집 불쏘시개로 쓰이거나 대가의 작품이 벽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조상의 뛰어난 예술혼이 배어있는 고서화가 지금까지 남아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세우는 데는 암울한 그 시대

    몇 안 되는 선각자의 애정과 빼어난 감식안 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재형 이 후지즈카에게서 세한도 를 찾아오게 된 얘기를 들어보면 이렇다.

        당시 경성제국대학 의 교수로 재직하던 후지즈카, 미전에 입상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그는 상당량의 고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었고 그것들을 모아 박물관을 지을 꿈을 갖고 있었다.

    그를 찾아간 손재형은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 자신의 글도 상당량 써 줄테니 세한도를 양보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후지즈카는 자신이 추사 김정희 연구로 학위까지 받은 사람이 추사 작품을 양보하겠냐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 1944년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그는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 동경의 자신의 본가로 건너갔다.

        전쟁의 막바지라 동경은 연합군의 공습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위험천만한 사지였으나 손재형은 물어물어

    후지즈카의 집을 찾아 근처의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세한도에 대한 후지즈카의 애정이 대단했기에 손재형은 장기전을 작정하고 병석에 있는 후지즈카를 1주일간 매일 병문안했다.

     

        1주일 후 후지즈카가 매일 병문안 오는 목적을 물었고 손재형은 세한도를 양보해 줄 것을 요구했다.

    후지즈카는 자신이 쓴 김정희에 대한 논문을 보이며 절대 양보할 수 없음을 강조했으나 손재형은 추사와 제자 사이의 뜨거운

    사제의 정이 흐르고 아무리 후지즈카가 아끼는 작품이지만 그가 죽고 나면 그가 아끼는 마음처럼 다른 일본인들은 그처럼 하지

    못하므로 세한도의 주인은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를 백여일 간 두 사람은 반복적으로 논쟁을 펼쳤고, 후지즈카는 자신이 죽기 전에는 줄 수 없고 세상을 뜰 때

    양보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겠다고 말하지만 손재형은 전세가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고 해서 더욱 양보할 것을 주장한다.

        그 후로 손재형은 10 여 일을 계속해서 찾아가지만 문전 축객을 당한다. 그리고 며칠 후 대문이 열리고 후지즈카는

    손재형의 열성에 세한도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손재형에게 세한도를 양보해 준다.

    얼마 후 후지즈카의 집에 포탄이 떨어져 불이나 소실되고 만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소중한 국보 한 점이 잿더미로 변할 뻔한

    아찔한 순간이며 일제강점기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고가로 사들여 지킨

     민족 문화재 수호의 귀감인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손재형은 즉시 당시 최고의 감식가 인 위창 오세창 에게 달려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고

    오세창은 즉석에서 감상글을 써 주었다.

        "전화를 무릅쓰고 사지에 들어가 우리의 국보를 찾아왔노라"고.

     

        손재형은 [조선서화동연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이 되고 1947년 진도중학교를 설립하고 1950년대 후반부터는 정치에

    투신해 정치가로 활약한다. 1958년 민의원에 당선된 손재형은 한국예술원과 의원 활동을 병행하면서 자금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목숨을 걸고 지켰던 서화 작품들을 하나둘씩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 썼다.

     팔기는 아깝고 돈은 써야 했으니 궁여지책으로 고리대금에 손을 댄 것이다.

        신용을 생명처럼 여기며 가화동에 살던 개성인 이근태 에게 손재형은 '세한도' , 단원 김홍도의 '군선도'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 를 맡기고 돈을 빌린다. 하지만 손재형은 첫 달부터 이자까지도 갚지 않았고 이근태는 몇 달 간의

    이자를 자기 돈으로 대신 메웠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었고, 손재형을 몇 번이나 찾아가 사정을 해도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궁지에 몰린 이근태는 남의 돈을 빌려서 남의 이자를 갚는 지경에 몰렸고, 급기야 집까지 날렸다.

    그 역시 고서화를 좋아해 김정희 작품과 정선, 심사정, 대원군 같은 거장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했었지만 그 작품들도 남의

    이자를 막기 위해 모두 팔았다.

        이자와 원금을 갚을 길이 없자 이근태는 손재형의 양해를 구한 뒤 그가 맡긴 작품을 팔기 시작했으나

    그 동안 갚지 못한 원금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무리 팔아도 소용이 없었다.

     

        '세한도' 는 개성 갑부인 손세기 에게 넘어갔고, 1974년 12월 31일 손세기의 아들인 손창근을 수장가로 하여 국보 제180호로

    지정받았다.

        당시 손재형이 소장해 이근태에게 저당 잡혔던 김홍도의 '군선도' 김정희의 '죽로지설', 일제강점기 경성부사에 실렸던

    정선이 76세에 비 갠 후의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인왕재색도' 등은 이병철 에게로 넘어가 지금은 용인의 호암미술관에

    소장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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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
     

    阮堂 김정희 '조선왕조실록'에는 추사 김정희에 대해 "철종 7년, 10월10일 갑오. 전(前) 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니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고 적혀있다.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은 삶

     

    -유홍준 교수가 말하는 '추사 김정희 삶과 예술'

     

     

    "추사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추사체가 뭐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어쩌면 추사체는 우리들이 쓰고 있는 글씨들이라고 해도 될지 모른다.

     

    그의 대표적인 글씨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를 보자 :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제주도 유배후 강상(한강 용산변의 강마을)시절의 대표작이다.

     

    글자의 윗선을 맞추고 내리긋는 획은 마치 치맛자락이 휘날리는 듯

    변화를 주었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글씨는 추사 김정희 밖에 없었다.

    빨래 줄에 빨래 걸린 듯하지만 필획이 맞으니 자유 분방하다고 표현한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유최진의 '초산잡서'에서)

     

     

    '잔서완석루'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선게비불(禪偈非佛, 사진)'과

    '판전(板殿, 사진)' 같은 작품을 보면

    추사체의 '괴이함'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선게비불'은 획의 굵기에 다양한 변화가 있어 울림이 강하고

    추사체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판전'은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대자 현판으로

    고졸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

     

    파격이라 하기보다는 어린애 글씨같은 천연덕스러움이 있다.

    추사체는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에 그치지 않고,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에까지 나아갔다.

      

    추사 글씨체 변화에 대하여

     

    추사체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천재성의 발로가 아니라

    판서를 지낸 아버지 김노경과 그 선조들,

    그리고 청나라 고증학이 합해져서 가능해진 것이다.

     

    추사와 동시대에 활동한 박규수는 추사체의 형성과 변천과정에 대해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듯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박규수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듯이 추사체의 골격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 시기는 제주도
    유배생활. 완당은 55세때인 1840년 10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속에서만 생활하도록 하는 형벌)

    되는 유배의 형을 받게 된다.
      유배가던 길에 있었던 일로 두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전주를 지날 때 그곳의 이름난 서가 창암 이삼만을 만난 얘기다.

    창암은 전형적인 시골 서생으로 요즘으로 치면 지방작가였다.

     

    원교의 글씨를 본뜬 창암의 글씨는 속칭 유수체라 하여

    그 유연성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흐름이 도도하지 못하여 영락없이

    시골 개울물 같은 면이 있었다. 그래서 꾸밈없고, 스스럼없는

    천진스러움의 진국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삼만의 '운학유천'. 시골서생의 순수함이 있다.

    대둔사 '대웅보전' 현판. 원교글씨.

     

    그런 창암이 완당에게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한 것이다.

    완당은 이때까지만 해도 배 갑판 밑에 모여사는 쥐의 수염만으로 만든

    붓 등 최고의 붓과 종이로 글씨를 쓴 '스타일리스트'였기 때문에

    창암의 개꼬리를 훑어내어 만든 붓으로 쓴 글씨를 보고 일순 당황했을 성 싶다.

    그때 창암은 완당보다 열여섯이 더 많은 71세의 노인이었다.

    현장엔 그의 제자들이 쭉 배석해 있었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창암은 완당이 삽짝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

     

    "저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전주를 떠난 완당은 해남 대둔사로 향했다. 절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니

    '대웅보전(大雄寶殿)' 네글자가 원교의 글씨였다.

    완당은 초의선사를 만난 자리에서

     

    "원교의 현판을 떼어 내리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것을 걸고 있는가!" 하고 지필묵을 가져오게해

    힘지고 윤기나며 멋스러운 글씨로 대웅보전 네글자를 써주며

    나무에 새겨 걸라고 했다.

    완당은 붓을 잡은 참에 '무량수각'이라는 현판 횡액을 하나 더 써주었다.




    대둔사 '무량수각' 현판.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써준 것이다. 획이 기름지고 윤기가 난다.

     

    예산 화암사 '무량수각' 현판.

    획이 가늘면서 힘과 멋이 함께 들어있다.

    제주도 유배시절 글씨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가지 전설은 완당 자신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고,

    원교의 글씨를 낮추어보는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누렸던 특권층의 삶과는 거리가 먼 척박하고 고독한

    유배생활 8년3개월을 보내면서 예스러운 멋과 회화적 조형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세계를 갖추게 된다.

    더 이상 어깨가 올라가는 일도 없어지며 골격은 힘있고

    필획의 울림이 강하게 느껴지는 추사체의 면모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9년뒤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완당은 대둔사에 다시 들러 떼어내리게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걸게 했으며, 전주에 들러 창암 이삼만을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완당은 강상(江上)에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절부터 완당 글씨의 특징을 보면 추사체의 파격미나 개성미,

    이른 바 괴(怪)가 완연히 드러남을 실감할 수 있다.

    글자의 구성에서 디자인적인 변형이 대담해지고,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붓끝에는 힘이 실리고, 획에 금석기가 있으며 필세에 생동감이 있는 등

    추사체의 참 멋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때 씌어진 명작 현판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

    유명한 단계벼루,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집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만으로

    자족하겠다는 선비의 마음을 말한다.

     

    이 현판 글씨는 글자의 구성미, 즉 디자인은 대단히 멋스럽고

    획의 흐름에서 리듬조차 감지된다.

     

     

    또하나 현판 글씨로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라는 작품이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앉아 있게 하네'라는 뜻이다.

     

    이 현판글씨는 구성미가 아주 뛰어나다. 그리고

    글자에 유머와 파격을 주어 추사체의 '괴'가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특히 밝은 명(明)자의 획을 삐뚜루 쓴 것이나, 앉을 좌(坐)를

    흙 토(土)위에 네모 두 개를 그려 마치 땅에 앉은

    궁둥이처럼 쓴 데서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것도 한쪽 궁둥이를 슬쩍 들고 비스듬히 앉은 듯 네모의 양감이 다르다.

     

    말년인 과천시절 완당이 남긴 '대팽두부(大烹豆腐)'는 결국 완당이 살아온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였는가를 말해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최고 가는 좋은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大烹豆腐瓜董菜

    최고 가는 훌륭한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高會夫妻兒女孫.

     

    글 내용과 글씨 모두가 완당의 예술이 평범성에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잘 쓰겠다는 의지를 갖지도 않은 상태에서

    절로 드러난 불계공졸의 경지이다.

     

    추사 김정희에 대하여

      추사 김정희는 1786년(정조10년) 오늘날 추사고택이라고 부르는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향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판서를 지낸 김유경이다.


      추사의 일생은 보통 다섯단계로 나뉘어진다.

    -태어나서부터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관직에 나아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양가는 55세까지 20년간 중년의 활동기
    -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 8년간의 만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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