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史哲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세계 최고의 여행기

慈尼 Johnny 2014. 1. 8. 21:27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세계 최고의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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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쓰인 열하일기는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연암, 왜 그는 과거(科擧)를 포기 했을까.

우리가 열하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

 

 

“유명한 여행기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별거 없습니다 서양인이 중국에서 와서 신기한 걸 본 정도에 그칩니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도 별거 없습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이븐 바투타라는 여행기가 하나 있습니다. 중세 이슬람 인명 사전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문체가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를 이루는 여행기는 열하일기뿐입니다. 열하일기에는 문명론부터 시작해서 천하의 형세를 꿰뚫을 뿐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탐구까지 담겨있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호방한 인물이었다. 연암의 웃음소리를 듣고 귀신도 놀라 도망 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동양고전, 2012년을 말하다]의 열하일기 강연을 맡은 고미숙도 호방한 인물이었다. 한 청중은 강연을 듣는 내내 “여장부야. 여장부.”라며 감탄을 뱉어냈다. 10년 전 연암을 만나고 삶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고미숙. 그녀와 함께 열하일기를 읽어보았다.

 



연암 박지원 [출처: 위키피디아]

 

 

연암, 그리고 다산

 

연암 박지원하면 실학 사상이 떠오른다. 실학 사상하면 자연스럽게 다산 정약용도 연상된다. 흔히는 연암과 다산을 유사하게 엮어서 생각한다. 하지만 그 둘은 여러모로 달랐다. 연암은 노론 명망가에서 태어나 뛰어난 문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과거를 포기하고 프리랜서 생활을 했다. 반면 다산은 남인출신으로 과거를 공부해 관료의 길을 걸었다. 때마침 정조가 탕평책을 피던 시기와 맞물려 중용될 수 있었다. 고미숙은 이를 보고 “연암은 원심력을 가지고 권력에서 멀어지려 했고, 다산은 구심력을 가지고 권력을 향해 나아갔다.”고 평가했다.

 

연암이 처음부터 과거를 포기했던 건 아니었다. 당시의 과거제도는 많은 부분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양반의 숫자가 급증하던 시기로 과거를 보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니 과거를 치를 때마다 응시자가 수만 명이나 되어 아수라장이 열리곤 했다. 격식과 규격을 싫어하던 연암에게 과거 제도는 고문이었다.

 

연암, 우울증을 앓다

 

연암은 청년 시절 우울증을 앓았다. 거식증과 불면증을 동반한 우울증이었다. 고미숙은 우울증이란 자기와의 소외에서 발병하는 자본주의 이후에 탄생한 병이라 진단했다. 과거에는 설령 굶주려는 죽어도 자기에게 소외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본주의 하에서 부자체의 욕망에 치우치며 자기 소외가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대 사람이 아니었던 연암이 우울증을 앓았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연암은 어떤 방식으로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노론 명망가의 자재였던 만큼 좋은 약을 구해 먹고 좋아진 건 아니었을까? 연암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저자거리로 나섰다. 그곳에서 연암은 분뇨장수, 이야기꾼, 도사, 건달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요즘의 철학적 용어로 설명하면 타자와의 접속을 시도한 셈이다. 연암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병을 치료함은 물론이고, 방경각외전이란 소설집을 써서 명성을 획득했다.

 

연암, 백탑파를 만들다

 

연암은 과거를 포기했다. 특정한 직업도 없었다. 30대의 연암은 백탑파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연암은 친구들과 함께 책 읽고 토론하고 사색했다.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부도 명예도 없었지만, 벗이 있었기에 연암의 30대는 행복했다.

 

하지만 이 행복도 오래가진 못했다. 당시의 권력자였던 홍국영은 연암을 곱게 보지 않았다. 결국 연암은 홍국영의 위험을 피해서 서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홍국영이 실각하고 연암은 서울로 돌아왔지만, 백탑파는 이미 해산한 이후였다. 죽은 이도 있었고, 생계가 어려워 시골로 내려간 이도 있었다.

 

하지만 연암에게 새로운 행운이 찾아왔다. 팔촌형 박명원이 건륭제의 만수절 (70세 생일) 축하 사절로 임명된 것이다. 덕분에 연암은 박명원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신단 일행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 여행에서 나온 글이 바로 열하일기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고미숙은 열하일기야말로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명한 여행기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별거 없습니다 서양인이 중국에서 와서 신기한 걸 본 정도에 그칩니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도 별거 없습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이븐 바투타라는 여행기가 하나 있습니다. 중세 이슬람 인명 사전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문체가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를 이루는 여행기는 열하일기뿐입니다. 열하일기에는 문명론부터 시작해서 천하의 형세를 꿰뚫을 뿐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탐구까지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고미숙은 열하일기를 대학을 다 졸업하고야 만났다. 제도권 교육에서는 열하일기를 통째로 읽지 않는다. 국어 국문과에서는 소설을 발췌해서 읽고, 철학과에서는 연암의 명문장을 발췌해서 읽는다.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을 읽고 있는 셈이다. 고미숙은 열하일기가 제대로 읽히지 않고 있는 현실에 아쉬움을 표하며, 문장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지금 바로 열하일기를 읽으라고 조언했다.

 

체력, 열하일기의 원동력

 

사신단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 황제가 있는 연경에 도착했다. 하지만 황제는 연경에 없었다. 열하의 피서산장에 있었다. 황제는 조선 사신단을 열하로 불러 들였다. 연암은 사신단 내부에서 특정한 업무를 맡지 않은 프리랜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꼭 열하를 갈 필요는 없었다. 한가하게 연경 유람을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박명원이 열하에 가면 기이한 걸 볼 수 있다며 연암을 꼬득였다. 결국 연암은 열하로 가는 일행에 합류하게 된다.

 

열하로 향하는 길은 고난 그 자체였다. 우선 시간이 촉박해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말을 계속 달리게 하고 그 위에서 잠을 자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밥도 먹을 수 없었다. 비가 많이 와서 불을 피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길이 평탄한 것도 아니었다. 하룻밤 동안 강을 아홉 개나 건너야 하는 험난한 지형이었다. 그렇게 700리를 달렸다. 하지만 연암은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글을 썼다. 그것도 그냥 글이 아니라 열하일기의 백미이자, 조선 최고의 한문 문장인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를 썼다. 연암의 가공할 만한 체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반적인 사람이 무박 나흘을 여행한다면 며칠은 죽은 듯이 잠만 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열하에 도착한 연암은 몇 시간만 눈을 붙이고 체력을 회복했다. 그러고는 열하에 있는 사람들과 밤새 필담을 나누며 우정을 쌓았다.

 

현대인은 편한 여행을 한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글을 쓰지는 못한다. 많은 경우 여행에서 돌아와서 기억을 재구성한 글을 쓰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글만 남긴다. 고미숙은 어떤 상황에서도 글을 쓸 수 있었던 연암의 신체를 부러워했다.

 

유머, 열하일기를 읽는 이유

 

우리는 고전을 엄숙하고 진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고미숙은 사람을 무겁게 만들면 진리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심오하고 깊은걸 진리라고 여기는 생각은 서양 철학에서 유래되었다고 진단한다. 고미숙은 고전은 무겁게 여기는 통념을 깨고 싶었다. 그리하여 연암의 유머와 해악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그러나 학계에서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연암을 지나치게 희화화했다는 이유였다.

 

고미숙은 열하일기를 읽는 가장 큰 이유가 유머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용후생이나 문명론도 뛰어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연암 못지 않은 학자들도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 웃을까? 고미숙은 웃음은 통념을 깰 때 발생한다고 이야기한다. 소위 말하는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웃게 된다. 하지만 웃으면서도 새로운 발견을 하고 우리의 삶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고미숙은 연암의 색다른 시각을 볼 수 있는 대목으로 호곡장(好哭場)을 꼽았다. 연암은 광활한 요동 벌판을 보고 울기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울음이란 희로애락이 사무칠 때 가능한 것임을 깨닫는다.

 

산모롱이에 가려 아직 백탑은 보이지 않는다. 재빨리 말을 채찍질했다. 수십 걸음도 못 가서 겨우 모롱이를 막 벗어났을 때, 눈빛이 아른거리면서 갑자기 검은 공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 오호! 눈앞에 하늘과 땅만이 우주를 가르는 아득한 공간이 펼쳐졌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멋진 울음터로구나. 크네 한 번 울어볼 만 하도다!”

 

(중략)

 

“사람들은 다만 칠정 가운데서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 뿐, 칠정 모두가 울 수 있다는 건 모르지. 기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슬픔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사랑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미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야.

 

왠 줄 아는가? 근심으로 답답한 걸 풀어 버리는 데에는 소리보다 더 효과가 빠른 게 없기 때문이야.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일세. 지극한 정이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 ㅣ절로 이치에 딱 맞는다면 울음이나 웃음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열하일기, 「호곡장」

 

 

기본적으로 연암은 웃음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연암은 옥전현이라는 마을에 들렀는데, 마을 점포에서 너무나도 재미있는 문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동행한 정진사를 불러다가 열심히 베꼈다. 하지만 연암이 베낀 부분과 정진사가 베낀 부분이 앞뒤가 맞지 않았고, 결국 연암은 조금 손을 봐서 열하일기에 싣는다. 그 유명한 호질의 탄생 비화다.

 

연암이 하도 열심히 글을 베끼자 점포 주인은 궁금해서 물었다.

“선생은 이걸 베껴 대체 무얼 하시려오?” 그러자 연암은 답했다.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번 읽혀서 모두들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 하려는 거요. 아마 이걸 읽는다면 입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갈 것이며, 튼튼한 갓끈이라도 썩은 새끼처럼 끊어질 것이외다.”

즉, 남을 웃기기 위해서 그 고생을 한 셈이다.

 

하지만 연암의 글은 재미있어서 문제였다. 정조는 고문의 위엄을 흔들리게 만든다는 이유로 연암의 글을 싫어했다. 웃음을 막으려고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가지는 공통된 특성인 모양이다.

 

연암의 삶에서 21세기의 길을 찾다

 

연암은 어느 한 곳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든지 떠돌아다니고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글을 생산해냈다. 고미숙은 이런 연암의 삶에서 21세기의 사유의 비전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연암에게 있어서 여행은 곧 길이고, 길은 곧 삶이며, 삶은 곧 글이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지성도 길 위에서 삶의 비전을 찾아내서 글로써 생산될 수 있다면, 모두가 자기 자신의 주체이자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보여준 여행과 사유가 21세기적 삶의 비전이 될 수 있습니다.”

 

인문학열풍의 진원지가 된 열하일기(熱河日記)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정조는 당시 사대부들의 문풍을 어지럽힌 배후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지목하고, 연암에게 순정한 고문(古文)체로 글을 지어 올리면 음직을 내리겠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졸지에 어떻게 순수하고 바른 글을 짓겠느냐며, 그것이 더 큰 죄를 짓는 것이라는 핑계를 둘러대면서 연암은 끝내 어떤 반성도, 전향도 거부한다. 일화에서 보듯『열하일기』는 정조의 시대뿐 아니라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다양한 사유를 촉발하는, 대단히 위험하고 강렬한 책이다.

 

살아있는 글

 

연암 박지원에게 글이란 남을 아프게도 하고 가렵게도 할 수 있는, 한마디로 '살아있는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열하일기에는 비장에게 들은 이야기, 하인들과 나눈 대화, 중국 선비들과의 필담 등 온갖 잡다하고 품격 없는 글들이 가득하다. '허생전'이나 '호질'처럼 현실을 풍자한 스토리가 있는가 하면, '호곡장'이나 '일야구도하기'처럼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주는 작품들도 포진해 있다. 아마도 영민한 정조는 연암의 문체에 함축된 사유의 반시대성을 꿰뚫었던 것 같다.  

 

 

 

『열하일기』는 모두 26권 10책으로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되어 있다. 연암이 44세 때인 1780년(정조 5), 삼종형 명원이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칠순 잔치 진하사로 북경에 가게 되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수행하면서 곳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당시 사회 제도와 양반 사회의 모순을 신랄히 비판하는 내용을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문체로 담았기 때문에 당시 위정자들에게 심한 배척을 당했다. 저자의 사후 아들 종간(宗侃)이 편집하여 57권 18책의 필사본으로 전하다가 초간본은 김택영에 의해 1900년에 원집이 나오고 1901년에 속집이 나왔다. 이 초간본은 고활자본으로 되어 있고 김택영의 관점에서 문장을 골라 실은 것이다.

 

 

연암체

 

책의 구성은 크게 2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권부터 7권까지는 여행 경로를 기록했고 8권에서 26권까지는 보고 들은 것을 한 가지씩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중 '도강록(渡江錄)'은 압록강에서 랴요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이다. 굴뚝과 구들 등 여염집의 구조와 배, 우물, 가마, 성(城)의 제도 등 배울 만한 것들을 자세히 서술하고, 모든 물건을 이롭게 쓸 수 있어 백성의 생활이 윤택해져야만 덕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이용후생의 주장을 편 글로 유명하다.

 

 

 

 

 

 

한편 이 안에 실려 있는 단편 소설 『호질』은 중국인의 작품임을 빙자해 공격의 화살을 피하면서, 백이·숙제 사당 참관기와 함께 양반 사회의 모순과 명분론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은 연경에서부터 열하로 가기까지의 기록으로 연경에 겨우 도착한 사신 일행이 열하로 피서가 있는 황제를 좇아 밤을 새워 달려가는 동안에 겪은 숱한 고생을 현장감 있게 서술하고 있다.

'옥갑야화(玉匣夜話)'는 옥갑이라는 여관에서 비장들과 나눈 여러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임을 빙자한 『허생전』을 이에 실어 그 나름의 부국강병책을 역설하고 있다.

 

이용후생

 

그 밖에도 음악, 미술, 건축, 과학, 교통제도까지 그가 보고 듣고 만난 것들에 대한 자세한 서술과 그에 대한 그의 견해를 만날 수 있다. 연암은 이 책을 통해 북학파의 사상을 역설하고 동시에 구태의연한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는 경직된 사고방식을 효과적으로 풍자하기 위해 사실과 허구의 혼입이라는 복합 구성을 도입했다. 즉 여정과 관련시켜 삽입해놓은 일화들은 보고 들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필요에 따라 창작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적 구성은 당시에 이미 연암체라고 일컬어진 정통을 벗어난 문장과 함께 기문(奇文)으로 지목받게 하는 요인이 되어, 정조를 중심으로 하는 수구세력이 일으킨 문체반정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열하일기의 문체가 정조에 의해 문제가 된 후 정조의 명에 의해 지어올린 '과농소초'·'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는 정통 고문으로 쓴 글로서 이 또한 그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훌륭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연암의 외모에 대해서 그의 아들인 박종채가 『과정록(過庭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큰 키에 살이 쪄서 몸집이 매우 컸으며 얼굴은 긴 편이었고, 안색이 몹시 붉었으며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눈에는 쌍꺼풀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현재 남아있는 연암의 초상화와도 거의 일치한다. 또한 그는 목소리가 몹시 커서 그냥 말을 해도 담장 바깥의 한참 떨어진 곳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자신의 중년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한 점 있었지만 연암은 그 초상화가 본래 자신의 모습에 7할도 못 미친다며 없애버리게 했고, 다시 그리자는 아들의 간청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경계인

 

연암과 부딪히는 모든 것들은 살아서 움직인다. 고정된 표상의 말뚝에서 이탈하여 자유롭게 변이하면서 그 무엇의 경계에 서있는 연암, 그래서 연암 열풍을 몰고 온 고미숙은 그를 경계인이라 칭한다. 경계인이란 이방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넘나드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고미숙은 후자를 뜻하고자 경계인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열하일기를 읽다보면 연암의 생각이 들려온다. 연암은 우리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며 다층사고를 하라고 권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의 가운데에 진리가 있고 도가 있다는 것이 연암의 생각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 열하일기를 통해 오늘의 우리가 배워야 할 연암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출처 :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heritagechannel

 

"열하일기"는  정부기관인 문화재청에서 번역을 끝내고 공개한 자료에서 볼 수있습니다. 

문제는 잘 이용을 안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이버나 다음에 자료를 검색해보면 한,두개가 검색될 뿐입니다)

 

아래 주소는 "한국고전종합"의 "열하일기"를 제가 검색해본 주소입니다.

원문은 "熱河日記 " 를 검색하면  볼 수도 있습니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bookListIframe.jsp%3FbizName=MK%26seojiId=kc_mk_h008

 

 

좌측의 검색창에서 아래로 따라 클릭하면 전부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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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열하일기


열린 마음으로 드넓은 세계를 보라


[ 熱河日記 ] 

 

저자 박지원

해설자 김명호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열하를 찾아서


조선조 1780년(정조 4)에
박지원(朴趾源)은 청나라 건륭(乾隆)황제의 7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외교사절단에 참가하여 중국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 해 음력 5월 말 한양을 출발해서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遼東) 벌판을 거쳐, 8월 초 드디어 북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건륭황제의 특명이 내려, 만리장성 너머 열하(熱河)까지 갔다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약 한 달 동안 머문 뒤 그해 10월 말에 귀국했다. 당시 박지원이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발전한 청나라의 실상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생생하게 기록한 여행기가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다.

 

 

 

 

「피서산장도(避暑山莊圖)」. 열하에 위치해 있는 피서지 그림이다.

 

 

열하는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약 230km 떨어진 하북성(河北省) 동북부, 난하(濼河)의 지류인 무열하(武烈河) 서쪽에 있다. 열하라는 지명은 무열하 주변에 온천들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 데에서 유래했다. 건륭황제는 이곳에다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는 거대한 별궁을 짓고 거의 매년 행차하여 장기간 체류함으로써, 열하를 북경에 버금가는 정치적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청나라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그의 치세 중에 열하는 황제를 알현하러 모여든 몽골·티베트·위그르 등의 외교사절들로 붐볐다.

박지원을 포함한 일행은 열하를 방문한 최초의 조선 외교사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열하에서 보고 들은 진귀한 견문을 자신의 여행기에 집중적으로 서술했을 뿐 아니라, 그 제목까지도 특별히 '열하일기'라 지었던 것이다.


독특한 유형의 연행록


청나라를 다녀온 여행기인 연행록(燕行錄)에는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일기 형식을 취해 여행 체험을 날짜순으로 기록하는 유형으로서,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를 비롯한 대부분의 연행록들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비교적 드물지만, 인물·사건·명승고적 등 견문의 내용을 주제별로 나누어 기록하는 유형으로서,
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첫째 유형은 여행의 전 과정을 충실히 기록할 수 있는 반면, 중요한 사항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하기는 어려우며, 중복되는 내용이 많아 산만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 쉽다. 둘째 유형은 주제에 따른 집중적인 논의를 할 수 있지만, 그 대신 여행의 전 과정을 제대로 전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열하일기』는 이와 같은 두 유형의 연행록들이 지닌 장점을 종합하면서, 아울러 그 나름의 창안을 가미하여 독특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우선, 주요 여정은 첫째 유형의 연행록처럼 날짜별로 충실히 기록해 나가되, 해당 일자의 기사에 포함시키기 힘든 중요한 사항은 독립된 한 편의 글로 서술해 두었다. 이는 둘째 유형의 연행록이 지닌 장점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열하일기』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특색은, 열하나 북경에 장기간 머물 때 얻은 잡다한 견문들을 시화(詩話)·잡록(雜錄)·필담(筆談)·초록(抄錄) 등 다양한 형식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는 점이다. 『열하일기』는 「도강록(渡江錄)」부터 「금료소초(金蓼小抄)」까지 모두 2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시화와 잡록에 해당하는 것은 「행재잡록(行在雜錄)」, 「피서록(避暑錄)」, 「구외이문(口外異聞)」, 「황도기략(黃圖紀略)」, 「알성퇴술(謁聖退述)」, 「앙엽기(盎葉記)」, 「동란섭필(銅蘭涉筆)」 등이다. 이러한 시화나 잡록을 통해 박지원은 당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청나라 학계와 문단의 최신 동향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속재필담(粟齋筆談)」, 「상루필담(商樓筆談)」, 「황교문답(黃敎問答)」, 「망양록(忘羊錄)」, 「혹정필담(鵠汀筆談)」 등 중국인들과 나눈 필담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필담들을 『열하일기』에 원고 그대로 싣지 않고,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도록 현장감을 살린 대화록으로 교묘하게 재구성해 놓았다.


그밖에도 중국 여행 중에 입수한 청나라의 공문서, 도서목록, 비문(碑文), 신간 서적 등 각종의 희귀한 자료를 초록하여 소개해 놓았다. 예컨대 『열하일기』의 마지막 편인 「금료소초」는 청나라 문인 왕사정(王士禎)이 지은 『향조필기(香祖筆記)』란 책에서 의약(醫藥)에 관한 내용을 초록한 것이다.

 

 

 

『열하일기』의 행로.

 

 

1830년대 초에 중국을 다녀온 바 있는 김경선(金景善)은 역대 연행록 중 가장 뛰어난 저술로 김창업의 『연행일기』, 홍대용의 『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꼽으면서, 『열하일기』는 '입전체(立傳體)'적 특징을 지닌 독특한 유형의 연행록이라고 보았다. 그가 말한 입전체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이후 중국 정사(正史)의 체제로 계승되어 온 기전체(紀傳體), 그 중 특히 열전(列傳) 형식을 가리킨다. 김경선은 『열하일기』가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니라 여행 도상에서 마주친 수많은 인간들을 생생하게 형상화한 일종의 '열전'이기도 하다는 점을 통찰한 것이라 하겠다.


중국 견문과 실학사상


내용상으로 볼 때 『열하일기』는 청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의 현실에 대한 풍부한 견문과, 이에 기초한
박지원의 실학사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열하일기』의 곳곳에서 박지원은 청나라가 눈부신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청나라가 한족(漢族)뿐만 아니라 몽골·티베트 등 주변의 강성한 민족들의 저항을 억누르려고 무척 고심하고 있음도 놓치지 않고 꿰뚫어본다.


또한 박지원은 상업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발전상을 다각도로 증언하면서,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할 구체적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열하일기』에서 그는 도시마다 시장이 번창하고 있으며, 도로와 교량이 잘 정비되어 있어 수레와 선박을 이용한 교통이 원활한 점, 궁전을 비롯한 각종 건축들이 크고 화려하며 벽돌을 사용하여 견고한 점 등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청나라처럼 벽돌을 널리 활용하고 수레를 전국적으로 통용하게 하자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청나라와 통상(通商)한다면, 국내의 산업을 촉진할 뿐 아니라 문명의 수준을 향상하고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발상을 전환하라


이러한
박지원의 실학사상은 청나라의 선진문물 수용을 통한 부국책(富國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양반들은 경제보다 도덕을 중시하는 유교사상으로 인해 상공업이나 농업의 실무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다. 또한 청나라는 오랑캐요,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라는 의식이 골수에 박혀 청나라의 선진문물조차 싸잡아 배격했다. 그러므로 실학사상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양반들의 고루한 사고방식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이 사물을 새롭게 인식할 것을 역설하고 있음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산장잡기(山莊雜記)」편 중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그는 마음을 차분히 다스림으로써 격류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자신의 체험담을 소개하며, 사물을 인식할 때 선입견이나 감각에 현혹되지 말고 주체적으로 사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 난생 처음 코끼리를 본 충격을 표현한 「상기(象記)」에서는, 이 세계가 우리의 좁은 식견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면서, 이처럼 광활하고 경이로운 현실 세계에 대해 편견을 버리고 개방적인 자세로 탐구할 것을 요청한다.


이와 같이 박지원은 주체적이고 개방적인 인식을 강조할 뿐 아니라, 개인의 제한된 관점을 고집하지 말고 더욱 높은 차원에서 사물을 보도록 촉구하기도 한다. 「일신수필(馹汛隨筆)」편 7월 15일자 일기에서 그는 중국 여행 중에 본 장관(壯觀)을 논하면서, 남들처럼 명승고적이나 산천 풍물, 웅장한 건축과 번창하는 시장 따위를 꼽지 않았다. 그 대신 관점을 완전히 달리하여, 하찮은 '기왓조각'이나 '거름 똥'이야말로 중국의 첫째 가는 장관이라는 역설적인 주장을 편다. 중국인들은 깨어진 기왓조각으로 집의 담과 뜰을 아름답게 꾸미고, 버려진 똥을 남김없이 수거하여 알뜰히 비축하니, 청나라의 문물이 발달하게 된 비결은 이처럼 하찮은 물건이라도 철저히 활용하는 그 실용정신에 있다고 본 것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여행기


『열하일기』에는 유명한 「호질(虎叱)」과 「허생전(許生傳)」이 실려 있다. 이 두 작품은 오늘날
박지원의 대표적 한문소설로 간주되고 있지만, 실은 우언(寓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호질」에서는 '범'과 '북곽(北郭)선생', 「허생전」에서는 '허생'과 대장(大將) '이완(李浣)'이라는 다분히 허구적인 존재들이 주고 받는 문답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고 있을 뿐더러, '범'이나 '허생'이 작자를 대신하여 펼치는 도도한 웅변에 작품의 흥미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이러한 우언의 형식을 빌어, 가급적 물의를 피하면서도 당시 양반들의 위선과 무능을 통렬히 풍자하는 한편 자신의 실학사상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설로 알려진 「호질」과 「허생전」에 소설적인 속성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특징이 다분한 반면, 『열하일기』에는 얼핏 소설과 거리가 먼 형식을 취한 듯한 부분들에서 도리어 소설적인 특징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도강록」 이하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에 이르는 전반부 7편은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에 갔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식 표현 기법을 종횡무진 구사하여 소설보다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열하일기』에 나타난 소설적 특징으로서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여행 중에 겪은 아무리 사소한 사건일지라도 이를 장면 중심으로 교묘하게 구성하여 매우 풍부하고도 흥미있는 체험담으로 재현해낸 점이다. 또한 이와 같이 장면 묘사를 추구한 대목들에서는 육성을 방불케 하는 생기 있는 대화를 구사하고 있다. 중국인과의 대화는 반드시 구어체인 백화(白話)로 표현하여 실감을 더하고 있으며, 우리말 대화 장면에서는 조선식 한자어와 우리 고유의 속담을 구사하여 토속어의 맛을 살리면서 해학적 효과도 거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곳곳에 일종의 복선을 설정하여 가급적 사건의 서술을 짜임새 있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그 한 예로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편 8월 5일자 일기에서 북경에 막 도착한 일행에게 열하로 급히 오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져 소동이 벌어진 대목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박지원은 자초지종을 곧바로 밝히지 않고, 먼저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이 간밤에 열하로 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부터 그린다. 그러고 나서, 숙소에 난데없는 소란이 일어나 그 원인을 알지 못한 일행이 법석을 피우고 청나라 통역관들이 허둥대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묘사하여 독자들의 궁금증을 잔뜩 돋운 뒤에야 비로소 열하 여행이 갑작스레 결정된 경위를 밝힘으로써, 사건을 한층 더 흥미 있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정밀한 세부묘사를 통해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경향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열하일기』의 도처에서 박지원은 여행 도중에 보고 겪은 자연 풍경과 기상(氣象) 변화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이역만리의 낯선 땅을 직접 여행하는 듯한 실감을 자아내게 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또한 그는 수레와 기계류, 벽돌을 이용한 건축물, 선박과 교량 등 청나라의 갖가지 문물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엄밀성을 갖추어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열하에서 구경한 중국의 신비로운 마술들이나 청나라 황제에게 진상한 세계 각국의 기이한 새와 짐승 따위를 여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이 세계가 경이로운 현상들로 가득 차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열하의 온천.

 

 

소설식의 사실적인 표현은 여행 도중에 마주친 청나라 각계각층의 인물들과 조선 사행의 구성원들을 묘사한 대목들에도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각종 상인, 직업적인 연희인(演戱人), 시골 훈장, 점쟁이, 도사, 승려, 창기, 하녀, 거지 그리고 조선 사행 중의 병졸이나 말몰이꾼, 박지원 자신의 하인 등등, 다른 연행록에서는 거의 무시되기 일쑤인 하층 민중들을 자못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한 점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박지원 자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비대한 몸집이나, 농담 좋아하고 겁 많은 성격조차 솔직하게 그려 보인다. 그리하여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문물을 탐구하고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진지하고 사려 깊은 선비일 뿐만 아니라, 소탈하고 인정이 많으며 인간적 약점도 지닌 인물로 매우 개성 있게 부각되어 있다.


해학과 풍자의 재미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씌어졌을 뿐더러 해학과 풍자가 넘치기에 더욱 재미가 있다.
박지원은 여행 도중에 목격한 우스운 사건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할 뿐 아니라, 수시로 일행들을 웃기는 자신의 익살스러운 언동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그려낸다. 그러나 『열하일기』에서 해학은 그러한 가볍고 유희적인 웃음으로만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해학과 풍자를 즐겨 구사한다. 진지한 사상적 논의를 펼 때마다 돌연 우스운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써,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그러한 대목에 여유와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도강록」편 6월 28일자 일기에서 박지원이 동행인 정진사(鄭進士)를 상대로, 성을 쌓는 데에는 벽돌이 돌보다 낫다고 조목조목 논하는 장광설을 펴자, 그 사이 졸고 있던 정진사가 깨어나, "내 이미 다 들었네.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면서"라고 대꾸하여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해학과 풍자는 당시 사람들의 고루한 사상을 깨뜨리는 데도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 「망양록」편에서 왕민호(王民皞)는 박지원이 양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보고, "선생은 제(齊)·노(魯) 같은 대국(大國)을 즐기지 않습니까?"하고 농담을 했는데, 이는 고사(故事)를 이용하여, 박지원이 소국에서 왔기 때문에 대국의 음식 맛을 모른다고 놀린 말이었다. 그러자 그는 즉시 "대국은 노린내가 나서요" 하고 응수함으로써 왕민호를 무안케 하고 만다. "양고기는 노린내가 나서 싫다"는 뜻의 이 해학적인 답변은 "청나라가 비록 대국이지만 노린내 나는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냐"는 풍자의 의미도 함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계화시대에 다시 주목받는 고전


지난 1990년대 이후 『열하일기』는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담은 사상서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문학을 대표하는 탁월한 문예작품으로도 재인식되면서, 그에 관한 연구가 학계에서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언론사에서도 『열하일기』에 주목하고, 압록강을 건너 열하까지 갔던 박지원의 여행길을 추적하는 기획을 다투어 추진했다. 그 결과물로 여행기들이 잇달아 신문에 연재되거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TV 다큐멘터리도 이미 여러 차례 제작·방영되어 대중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그로 인해 『열하일기』 번역본을 찾는 독자들이 날로 늘고 있으며, 열하 여행도 이제 관광코스의 하나로 정착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필사본 『열하일기(熱河日記)』(단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그러면 이른바 세계화시대인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열하일기』는 어떤 현대적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필자는 『열하일기』 「도강록」 7월 8일자 일기 중의 일부를 소개해 두었다. 광활한 요동 벌판을 처음 대면하고 감격한 박지원이 이곳이야말로 "통곡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외친 대목이다. 당시 조선의 선비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좁은 국토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이를 숙명으로 알고 살았다. 그런 실정에서 더욱이 박지원은 일찍부터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연구해 왔던 만큼, 꿈에도 그리던 중국 여행이 실현되었을 때 그 감격이 어떠했겠는가. 저 요동 벌판과 같이 한없이 드넓은 세계로 나선 해방의 기쁨은 통곡으로밖에는 표현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박지원과 달리, 해외여행을 자유로이 할 수 있고, 게다가 전 세계가 급속히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식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반면 세계화의 도도한 물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에 표류하지 않고 주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우리 시대의 화두(話頭)라고 한다면, 『열하일기』는 그에 대해 훌륭하게 응답하는 고전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열린 마음으로 드넓은 세계를 보도록 깨우치는 『열하일기』야말로 세계화시대에 다시 주목되어야 할 값진 문학적 유산이 아닐까 한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박지원은 「황교문답」의 서문이나 '심세(審勢)편'에서 청나라를 여행할 때 중국인에게 취해서는 안 되는 행동과 청나라의 실정을 관찰할 때 유의해야 할 점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낯선 외국을 여행하면서 그 나라의 실정을 관찰할 때에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는지 알아보자.

2. 박지원이 열하를 방문했을 당시 마침 티베트 불교계의 지도자인 판첸 라마도 건륭황제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묵고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티베트 불교와 판첸 라마에 관해 소개한 부분을 찾아보고, 청나라가 이처럼 판첸 라마를 융숭하게 대접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자.

3. 박지원의 중국 여행을 상상하기 위해 중국 지도를 펴 놓고 그의 여행길을 짚어 보자.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 벌판을 지나고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북경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북경과 열하에 장기간 머물면서 그가 보았던 중국의 명승고적들을 조사해 보자.

4.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처음 접한 소감을 토로한 「도강록」 6월 27일자 일기나, 중국의 신비로운 마술을 소개한 「환희기(幻戱記)」에 덧붙인 글 등에서 박지원은 앞을 못 보는 장님이야말로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역설적 주장을 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5.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등에서 박지원은 새로운 천문학설로서 지구가 둥글 뿐만 아니라 스스로 돌고 있다는 지구자전설(地球自轉說)을 주장하면서, 아울러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무수한 별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중국의 지식인들을 상대로 이와 같은 주장을 한 이유와 근거는 무엇일까?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2045&cid=263&categoryId=1037

 

 

 

자료제공 : 미국직송 건강식품 아이헬스라이프 www.iHealthLif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