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史哲

음양 오행설 의 역사

慈尼 Johnny 2008. 1. 20. 06:57

음양오행설의 역사 / 양계초  

1. '음양'의 의미 변천

{설문해자} 부부(阜部) : "음(陰)은 어둡다는 뜻이다. 강의 남쪽, 산의 북쪽을 가리킨다. '부(阜)자를 합하고 '음'자를 음으로 한다. 양은 높고 밝다는 의미이다. '부'자를 합하고,'양( )'자를 음으로 한다."운부(雲部) : "음( )은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이다. '운(雲)'자를 합하고 '음(今)'자를 음으로 한다.

 

 

'음'자는 이것의 옛날 글자이다."물부(勿部) : "양( )은 연다는 의미이다. '일(日)'자와 '일(一)'자 그리고 '물(勿)'자를 합한다. 날린다는 뜻도 있고, 길다는 뜻도 있고, 굳센 것이 많은 모습이기도 하다"'음'에 들어 있는 '운(云)'자는 옛날의 '운(雲)'자이다. 따라서 '음'의 본의는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이며,그것이 확대되어 일반적으로 가린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또 확대되어 어둡다, 뒤쪽이나 이면 혹은 북쪽이라는 뜻이 되었다.'양( )'은 '일(日)'자와 '일(一)'자를 합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해가 땅 위에 있는 모습이므로 일출의 의미를 지닌다. 해의 광채, 따듯하다, 앞쪽이나 표면 혹은 남쪽이라는 뜻으로 되었다.음양이 서로 연속된 하나의 명사가 되고 무형무상한 두 가지 대대적인 성질을 가리키게 된 것은 대체로 공자 혹은 노자부터 시작되었다.

 

 

{시경}어둑어둑한 그늘[음]이며, 우르르 울리는 우레로다화기로운 골짜기 바람이 그늘[음]을 몰고 와서 비를 내리나니수레 앞턱나무에 끈을 묶되[陰靷] 매듭 위에 백금고리를 씌우고어여쁜 기장 싹을 어두운 [음] 비가 살찌우니하늘이 어두운[음] 비를 내리지 않을 때에정월에 얼음창고[능음]에 들여다 놓고또 어두운[음] 비에 근심을 하니 이미 너를 감싸는데도[음] 도리어 내게 와 성을 내나니우르르 울리는 저 우레 소리, 남산의 남쪽[양]에서 울리거늘 임이 의기양양[양양], 왼손에는 생황을 잡고 방을 통해 오른쪽으로 나를 부르니 내가 외삼촌을 배웅하여 위수 북쪽[양]에 다다랐네봄볕이 비로소 따뜻해져서[양]검게도 물들이고 누렇게도 물들여서 붉은 빛이 밝게 빛나거든[양]흠뻑 내린 이슬이여, 볕[양]이 아니면 마르지 않으리니돌아오고 돌아옴이여, 해가 또 시월[양]이로구나세월이 벌써 시월[양]인지라, 여자의 마음이 상심하니 흡수의 북쪽[양]에 있으며기산의 남쪽[양]에 거하셨다그 저녁 빛[양]을 헤아리니 빈땅에 거함이 진실로 크도다오동이 자라나니, 저 아침볕[양]에 나도다용 깃발이 양양[양양]하게 날린다해그림자를 바라보고 언덕 위에 올라 산의 북쪽[음]과 남쪽[양]을 살피고

 

 

{서경}기러기[양조]가 서식하는 곳 화산의 남쪽[양]으로부터 흑수까지가 양주이다민산의 남쪽[양]남쪽으로는 화산의 북쪽[음]에 이른다하늘이 은밀히[음] 아래 백성을 정하여이에 혹 어두운 여막[량음]에 거하면서 삼 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고

 

{주역}의 효사우는 학이 그늘에 있으니 그 새끼가 화답한다

은주시대 이전의 이른바 음양이라는 것은 자연계 속의 하찮고 미세한 현상에 불과 하였으며, 어떤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음양 두 글자의 의미가 비약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대개 노자(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안는다 )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노자}의 오천자 중에 음양을 말한 것은 단지 위 구절 하나이며, 책 중에서 커다란 비중을 가지는 것도 아니므고 노자와 음양설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수용 불가하다.공자의 철학은 우주에 두 가지 힘이 있어서 그것이 상호대대하고 상호작용하면서 모든 존재가 발생한다고 파악한다. 이 두 가지 힘은 표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종종 대대하는 명사로 형용되며 음양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음양은 공자의 이원철학 중의 한 부호이며, 그 속에는 어떠한 신비적인 의미도 존재하지 않으며, 허망한 술수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2. '오행'의 의미 변천

오행이라는 글자가 가장 먼저 경전에 나타난 것은 {상서}[감서](유호씨는 오행을 업신여기고 삼정을 태만히 하였다.)이나 여기서 오행은 다섯 가지 마땅한 도리로 해석할 것 같다.그러므로 후세의 오행설과 관계가 없다.그 다음은 {홍범}[홍범오행전]이다. 내가 들으니 옛날에 곤이 독을 막아서 홍수를 다스리려고 하여 오행을 어지럽혔다고 한다.……(홍범구주 중에)

 

첫 번째 것을 오행이라고 한다. 첫 번째는 수이고, 두 번째는 화이며, 세 번째는 목이고, 네 번째는 금이고, 다섯 번째는 토이다. 수는 아래로 젖어들고, 화는 위로 타오르며, 목은 휘어지거나 곧은 것이고, 금은 마음대로 구부릴 수 있고, 토는 곡식을 생산할 수 있다. 아래로 젖어드는 수는 짠맛을 띠고, 위로 타오르는 불은 쓴맛을 띠며, 휘어지거나 곧은 목은 신맛을 띠고, 마음대로 구부러지는 금은 매운맛을 띠고, 곡식을 생산해 내는 토는 단맛을 띤다.물질을 다섯 가지 종류로 구분하고 각각의 기능과 성질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할 뿐 철학적 의미는 없다.{홍범} 자체는 정치서로 홍범구주에서 오행을 가장 먼저 거론한 것은 물질적 요소가 인류의 경제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묵자 墨子} [경하 經下]와 [경설하 經說下]오행에는 상승의 관계가 없으니 그 설의 요점은 마땅함에 있다. {홍범}에서 말하는 오행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오행설이 극히 허탄해지고 조직화되는 것은 {여씨춘추}의 십이람(十二覽)에서부터이다. 그 후에는 {소대례기 小戴禮記}가 그 학설을 채용하였고, {회남자 淮南子} 역시 그 학설을 채용하였다. 그 학설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사리는 다섯 가지 종류로 나누어서 이른바 오행 속에 편입된다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상야릇한 체계는 마침내 이천 년 동안 모든 사람들의 심리에 뿌리내렸고, 모든 사람의 일을 지배하였다.

 

 

 

3. 음양가의 성립과 음양오행설의 전파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음양이라든가 오행이라든가 하는 말이 매우 드물게 나타나고, 그 의미도 극히 평이한 것이었다.또 이 두 가지 말이 함께 연용된 적도 없었다.음양오행설을 지은 사람은 그 시원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방사에게서 비롯되나 그 이론을 구축하고 전파한 세 사람은 추연(鄒衍)과 동중서(董仲舒), 유향(劉向) 이다.

 

 

음양오행설이라는 요언을 만들어 낸 사람은 추연이고 이것은 진한시대의 모든 사상계를 휩쓸었다.양한 시대의 이른바 금문경학자들의 학설 중 음양오행에 대한 취향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이삼 할도 되지 않으며, 한유들의 음양오행학은 동중서에서 시작되어 유향과 유흠 부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음양오행설과 관련 문헌의 연구 서복관(徐復觀)

 

1. 문자학의 관점에서 본 '음양'의 원시적 의미

{설문해자} 제11편 하 운부(雲部)"'음( )'은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이다. '운(雲)'자를 합하고, '금(今)'자를 음으로 한다. '음( )'은 고문에서의 '음( )'의 생략된 글자이다."단옥재(段玉裁) "오늘날의 음양이라는 글자는 소전(小篆)에서 '음양( )'으로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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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해자} 제9편 물부(勿部)"'양( )'은 연다는 의미이다. '일(日)'자 그리고 '물(勿)'자를 합한다. 날린다는 뜻도 있고, 길다는 뜻도 있고, 굳센 것이 많은 모습이기도 하다."단옥재"이것이 음양(陰陽)의 정자이다. 음양이라는 글자가 쓰여지면서 음양( )이라는 글자는 없어졌다."

 

 

음양관념과 관련이 있는 모든 변화는 햇빛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음양( )'이라는 원의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2. {시경}의 음양관념

 

 

"음" : {시경} 대체로 8개의 '음'자가 나온다.네 개는 '음'자와 '우(雨)'자가 연용된 것이고,[패풍]의 "어둑어둑한 그늘'陰'"에서의 '음'자는 날씨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고,[진풍 소융 秦風, 小戎]과 [빈풍 칠월]에서의 '음'자는 모두 어둡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아 상유]에서의 '음'은 덮는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양" : {시경}에서는 대체로 18개의 '양'자가 나온다.열하나는 산이나 강의 방위를 두고 말한 것이고,[소아 담로]의 '양'자는 햇빛을 의미하고,세 개의 '양'자는 따듯하다는 의미로 쓰이고,[빈풍 칠월]에서는 밝게 빛난다라는 의미로 쓰이고,[왕풍 군자양양]에서는 날씨가 맑다는 의미가 확대되어 자득한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다.

 

 

"음양" : 한 군데에서 보인다.[대야 공유] "산의 북쪽(陰)과 남쪽(陽)을 살피고"여기서 음양은 산의 북쪽과 남쪽을 가르킨다.

 

{시경}에 나타나는 모든 '음''양'에는 후대처럼 만물을 형성하는 원소로서의 음양이기(陰陽二氣)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 춘추시대 음양관념의 전개

춘추시대에 이루어진 음양관념의 가장 큰 발전은 음양을 천(天)이 생성한 육기(六氣)중의 이기(二氣)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즉 음양 자체가 이미 실체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춘추좌씨전} [소공] 원년 : "……

 

육기란 음(陰) 양(陽) 풍(風) 우(雨) 회(晦) 명(明)이다. 그것이 나누어지면 사지가 되고, 질서를 갖추면 오절이 되고, 지나치면 재앙이 된다."이 시기의 음양은 단지 춥다거나 덥다는 감각을 실체적인 기로 추상화한 것 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풍 우 회 명과 함께 육기라고 칭해질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목구비 등 인간의 감각기관이 접촉할 수 있는 구체적 존재였지 후대의 음양이기와 같이 감각기관이 접촉할 수 없는 추상적인 존재는 아니었다.{춘추좌씨전}에 근거한 춘추시대의 음양관념음양은 천지 사이에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육기 중의 두 가지 성질의 기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육기는 사람과 관련을 가지기 시작하였다.육기 가운데에서도 음양이기는 풍 우 회 명 등 네 가지 기에 비해 좀 더 추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이 합리적인 상상을 하는 데 보다 유용하였고, 그 상상에 가해지는 제약도 나머지 것들에 비해 작았다. 그래서 육기 중에서도 점차 부각되어 다른 많은 현상이나 사물들과 연관을 맺게 되었다.

 

 

4. 춘추시대의 오행관념

'오행'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상서 尙書}의 [감서 甘誓]이며, 그 다음이 [홍범 洪範]이다.오행은 만물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기본적인 원소로서 인도 불교의 이른바 사대(四大)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오행관념의 운용은 주로 이 다섯 가지 원소의 상호연관, 즉 이른바 상생 상승하는 상호연관을 통해서 정치와 사회, 인생 그리고 자연의 각 방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집중된다.

 

 

오행의 본래 의미는 사람들이 일용하는 다섯 가지 생활자료였으나 후에 점진적인 변화와 전개를 거치면서 점차 그 의미가 확대되어 자연현상과 생활현상의 변화를 해석하는 도식으로 정립되었다고 가정할 수 있을 뿐이다.

 

 

오행을 다섯가지의 천신으로 인식하는 것은 진나라 이후에 점차 형성된 관념이다.{춘추좌씨전}이나 {국어}를 통해서 본 춘추시대의 이른바 오행은 모두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다섯 가지 실용적인 생활자료를 가리키는 것이다.그것은 결코 후대에서 말하는 오행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

 

 

 

5. {금문상서}에 대한 나의 일반적인 문헌학적 관점

{금문상서 今文尙書}에 있는 28편의 자료는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첫 번째 부류는 처음부터 원시적인 문헌 없이 많은 구전되는 전설만 있었던 경우이다.{상서}중의 [요전 堯典] [고요모] [우공]첫째, 구전의 시간적인 지속성이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둘째, 구전되는 내용이 구전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유동하고 증감, 변화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셋째, 구전의 언어관념은 기록되던 시기에 유행하던 명사관념으로 표현되곤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 부류는 원전을 새롭게 정리한 자료들이다.{상서}중에 [감서] [탕서 湯書] [고종융일 高宗 日] [서백감려 西佰戡黎] [미자 微子] [홍범][감서[ [탕서] : 연대가 오래된것으로 서주의 사신에 의해 정리.[홍범] : 정치법전으로 기자(箕子)와 주나라 왕실에 의해 정리. [감서]등이 원전의 정리를 통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 근거문체로 볼 때 그것들은 모두 단일한 사건의 완전한 기록이다.

 

 

내용상으로 볼 때 그것들의 문자가 주초의 문자에 비해 많이 평이하기는 하지만 앞에서 서술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초의 문헌에 나타나는 도덕관념은 [요전]에 비해 단순하고, [감서] [탕서] 등에 나타나는 도덕관념은 주초의 문헌에 비해 더욱 단순하다.세 번째 부류는 전승되어 왔던 원시적인 자료들이다.[상서 반경] [주서 周書]6. [

 

 

감서]의 성립시기와 그 중의 오행 문제

굴만리는 {감서}에서 '육경' '오행' '삼정' 등 세 개의 명사, 특히 '오행'이라는 명사가 나타난다는 점에 근거하여 그것이 "종시오덕(終始五德)의 설을 채용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여씨춘추}가 진(秦)나라 8년 이전에 완성된 작품이라는 것에 근거하여 "[감서]의 성립시기는 추연이후 진나라 8년 이전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가 없다.추연 종시오덕설의 출현 → [감서]를 위조한 사람의 원용 → 유가, 묵가, 도가(장자): 모두 [감서]의 진실성을 승인[감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단히 단순하고 질박하여서 결코 춘추시대나 그 이후의 발전된 정치 도덕사상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의 원시적인 자료가 하나라의 전적이며, 그것이 주대의 사관이나 공자 문하에 의해 정리되어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7. [홍범]의 성립시기와 그 중의 오행 문제

 

 

[홍범]은 정치법전이며 신화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유절(劉節)은 {홍법소증}에서 [홍범]의 저작시기가 전국시대 말기라 했다. 그러나 유절의 {홍범소증}에서 가해진 논증은 혼란스럽고 견강부회한 것이어서 하나라도 긍정될 만한 것이 없다.굴만리의 {상서석의 尙書釋義}와 [{상서}중의 신뢰할 수 없는 자료들]이란 글에서 나타나는 [홍범]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유절의 학설을 채용하고 있으나 그는 [홍범]의 성립시기를 전국시대 말기에서 전국시대 초기로 올려 잡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믿기 힘들고, [홍범]이 [추연]이전에 쓰여졌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없는 듯 하다. [홍범]의 오행은 인사와도 완전히 무관하며, 천인감응의 교량이나 실질은 더욱 아닌 것이다. [홍범]의 오사, 오기, 오징, 오복 등은 결코 오행과 배합되어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홍범]에서는 그것들과 오행의 어떠한 연관도 발견할 수 없다.[홍범]의 오행을 추연으 오행과 억지로 일치시키는 것은 추연 자신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전한시대의 유자들에 의한 것이다.

 

 

[홍범]에 대한 공영달의 {오경정의 五經正義}의 해석 : [홍범]의 오행은 단지 사회 생활에 필수적인 실용적인 생활자료일 뿐이며, 조그마한 신비적, 형이상학적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고, 전국시대 말기에서부터 양한시대에 이르기까지 점차 형성된 음양오행설을 한곳에 섞어 놓은 엉터리 학설이다.

 

 

[홍범]의 오행은 추연 이후의 오행과 본질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간략하고 번다하지 않은"것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육부나 오행의 확보를 특별히 중시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8. 전국시대 음양관념의 변화 및 {역전}의 발전

춘추시대에는 음양관념이 사관(史官)이 주관하였기 때문에 음양이 태양과 관련이 되고 날씨의 한난,사시의 발생과 연계되고 있다.음양과념이 결정적인 변화, 발전을 하게 된것은 {역전 易傳}의 발전에 따른 것이다. 묵자는 {묵자}에서 음양을 춥고 따듯함으로 시절의 순서를 가른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춘추시대의 관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유가계통 중에서 {논어}나 {중용} {맹자}에서는 음양의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순자}에서는 음양의 관념이 나타나는 데 음양을 천지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즉 선진시대 유가는 일반적으로 음양 조화의 관념과는 상당한 거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역}에 대해 진일보한 해석을 가한 것이 {역전}이다.{역전}은 공자와 그의 후학들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이다.

 

 

강유를 통해 괘사을 해석함으로써 개개 실물의 제약을 탈피하여 비교적 합리적인 법칙을 구축할 수 있게 된것은 역의 일대 진보이다.{역}의 발전순서는 "괘사 효사 → {역전}의 '자왈'이하 부분으로 대표되는 공자의 역학 → 대상 →단사 소상 → 건괘 문언전 → 계사전 → 설괘전 → 곤괘 문언전 → 서괘전 →잡괘전"으로 볼 수 있다.[계사상] 제1장과 제2장은 강유의 관념을 통해서 역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교적 초기의 자료들로 볼 수 있다.

 

 

[설괘전] 에서는 음양과 강유 인의가 병렬되고 음양의 관념이 개입되기 시작하였으나 이 세 가지가 하나의 체계로 조직되어 있지 않았으니 이것은

중기의 자료가 된다. 음양을 만물을 낳는 우주의 두가지 기본적인 원소이자 이 두가지 원소의 법칙적인 변화, 활동으로부터 형성된 우주 창조의 대원칙 대규범이며, 아울러 인생과 만물 속에 편입되어 관주된 인생과 만물의 성명(性命)으로 인식함으로써 음양관념이 그 발전을 완성하게 된다.

 

 

음양관념은 장기간에 걸쳐 부지불각하는 사이에 발전하였는데 {주역}에 그 관념이 주입된 이후에는 의식적인 구축과정을 통해서 완성에까지 다다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역전의 전승지는 노나라와 제나라인데 증자, 자사, 맹자, 순자학파는 역의 전승과 별 관계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역전}의 계통은 아마도 유가에서 다른 한 유파를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9. {역전}과 도가의 관계

{역전}과 도가의 비교 역전:양강, 적극적, 인문적 세계 구축도가:음유, 소극적, 자연으로의 회귀*공통점:음양을 통해서 우주의 창조와 변화를 해석역전의 작자로부터 먼저 발달후기 도가가 {역전}에서 취한 것은 단지 {역전}의 음양관념이다.도가학파는 음양의 새로운 관념이 자신들의 선배에게서가 아니라 {역전}에서 나왔음을 인정.{역전}의 음양관념이 먼저 있었고, {장자}의 음양관념이 나중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전진시대 도가는 새로운 오행관념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10. 전국시대 오행관념의 전개와 추연음양오행은 원래 서로 상관이 없는 두 개의 명사였다. 음양관념은 오행관념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나, 오행관념은 음양관념과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행관념이 유행하게 된 것은 그것이 음양관념속에 편입된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음양관념의 발전은 필연성과 진보성을 가지고 있었던데 비해 오행관념의 발전은 우연적이고 무의미한 것이었다.

 

 

{여씨춘추}의 십이기는 현재로 볼 때 오행관념을 여러 가지 측면에 투영하여 완전한 체계로 만든 최초의 전적이다.오행설이 천문상의 오행에 적용된 것은 한초에 이루어진 것인데 오행관념의 전개는 고대의 천문가와 무관하다. 도리어 오행관념의 전개는 사회의 저급한 미신 중에서 배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오행을 잡다한 사회적 미신으로부터 끌어내 새로운 학설을 구축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한 것은 추연으로 부터 시작된다.추연의 학설의 세가지 측면

 

첫째, 오행과 음양을 결합하기 시작하였다.

둘째, "괴이하고 우활한 학설을 만들어 냈다"는 부분 - 성상(星相), 방술(方術)에 관한 여러가지 미신을 음양오행 관념 속에 편입시켜 체계적인 이론으로 만들었다.대구주설(大九州說) : 중국은 천하의 1/81에 불과하다.셋째, '오덕종시설' : "오덕이 전이함에 따라 통치에는 각각 올바른 제도가 있다."

추연은 오행을 다섯 가지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라 다섯 가지의 기, 곧 다섯가지의 원소로 보았다.

 

 

 

11. 음양오행의 융합-{여씨춘추}에서 동중서까지

음양과 오행을 결합시키고 있는 문헌들은 모두 {여씨춘추}이후의 문헌들이다.음양오행사상은 전한시대에 더욱 완전한 구조를 갖추게 되었으며, 그것이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은 동중서로 부터이다.동중서에 의해 이루어진 변화 {춘추번로} 첫째, 음양과 오행이 더욱 명료하고도 밀접하게 결합.: "……나누어지면 음양이 되고, 쪼개져서는 사시가 되고, 나열되어서는 오행이 된다."

 

 

[오행상생]둘째, 음양오행을 통해서 천과 인간의 관계를 보다 구체화시켰으며, 그에 입각하여 천인의 감응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 "천지의 표징과 음양의 복사본은 항상 인간의 몸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몸은 하늘과 같다." [인부천수 人副天數]셋째, 천인의 관계가 위와 같이 밀접해짐으로써 인륜도덕도 천과 동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 "음은 양의 짝이 되고, 지어미는 지아비의 짝이 되고, ……"

 

 

[양존음비 陽尊陰卑] 넷째, 음양설을 통해 전한왕조가 계승한 형벌위주의 법가 정치를 덕을 숭상하는 유가사상으로 바꾸려고 하였다. : "음은 형벌의 기이고, 양은 덕의 기이다. ……" [양존음비]다섯째, 천하를 통일한 황제를 겨냥하여 {춘추}의 재이설을 확대시켰으며, 동시에 [홍범]에 나타나는 실용적인 사물로서의 오행을 생성과 변화를 주관하는 오기(五氣)로 변질시켰고, 한발 더 나아가 오기로 변질된 오행을 [홍범]의 오사와 밀접하게 연관시켜, 재이를 통해서 표현되는 천의(天意)의 징험을 결정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음양오행설을 집대성한 것이 {한서} [오행지]이다.음양오행가의 사상-한대 사상의 특질과 함께- 곽위(郭爲)

1. 음양오행가 사상의 성분

1) 종교적 성분

천도와 인사가 서로 감응하여 자연현상이 인사의 길흉을 보여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도 그것과 상응하는 자연의 현상으로 촉발시킬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천인감응설>이 종교적 성분이다.사람들의 믿음을 불러 일으킬 수는 있지만 합당한 지식을 던져주지는 못하는 설법이 바로 종교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한대의 유자들은 음양오행가의 학설 중에서 단지 그 종교적인 요소만을 계승하였고 과학적인 요소는 소홀히 하였다.

 

 

2) 과학적 성분

과학적인 요소는 천문지식과 자연의 변화를 연구하는 지식을 진보시켰다는 것이다. 사마담의 [논육가요지] : "음양술을 보건대 길흉의 징조를 중시하지만 기휘하는 것이 많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구애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많게 한다. 그러나 사시의 큰 순서를 정리한 것은 버릴 수 없다.""사람들로 하여금 구애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많게 한다."는 것은 음양오행가 학설의 종교적 요소를 가리킨 말이고, "사시의 큰 순서를 정리한 것은 버릴 수 없다."는 바로 과학적인 요소를 가리킨 말이다.

 

 

 

2. 음양오행가 사상의 연원

1) 고대술수와의 관계음양오행가 사상의 기본관념은 '천인상응' 다시말해 천도와 인사가 서로 감응한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에는 술수학이라고 있었는데 이 술수란 자연의 현상에 근거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써 인사의 길흉을 예측하는 것이다. {한서} [예문지]에 술수에는 천문(天文) 역보(曆譜) 오행(五行) 시구(蓍龜) 잡점(雜占) 형법(形法) 등 여섯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이 중에 천문 역보 오행 잡점의 네가지가 천인상응을 중시한다. 추연은 바로 이러한 사상을 부연하여 이론화시키고 자연현상과 인사의 관계에 대해 여러가지 추측을 가함으로써 한 학파의 언설을 만들어 냈다.

 

 

 

2) 천문과의 관계[예문지] : "천문이란 이십팔수를 정리하고 오성(五星)과 일월을 연구하여 길흉의 상을 기록하는 것이니 성왕들의 정치에 참고가 되는 것이다. {역}에서는 '천문을 관찰하여 때의 변화를 살핀다.'고 하였다."{주역} [계사상] : "하늘이 자연의 상(象)을 드리워서 길흉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이니 성인이 그것을 본받았다. 황하에서는 하도(河圖)가 나오고 낙수에서는 낙서(洛書)가 나오니 성인이 그것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말은 음양오행가의 말 바로 그것이다.고대 천문가들은 대부분 점술가들이며, 음양오행가의 선구자들이다.그들의 천문에 대한 관찰은 과학적 지식이다. 그러나 천문에 근거하여 인사의 길흉을 예측하는 것은 종교적 사상이다.

 

 

 

3) 역보와의 관계

(1) 역보의 의미 [예문지] : "역보라는 것은 사시의 위치를 정리하고 분지의 절기를 바로 잡으며, 일월과 오성의 별들을 모아서 추위와 더위, 죽고 사는 것의 실질을 고찰하는 것이다."역보에서의 '역(曆)'은 사시와 절기의 시간을 기록한 책이고, '보(譜)'는 사시와 절기를 추산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역보는 역서(曆書)를 지칭한다. 예문지의 역보도 이것이다.(3) 역보에 있어서 추연의 과학적 성과{사기}[역서] : "대개 황제(黃帝)가 성력(星曆)을 고정(考定)하고 오행을 건립하였으며, 소식(消息)을 일으키고 윤여(閏餘)를 바르게 하였다. ……추연이 오덕이 전이되는 법칙을 명찰하고 소식을 구분하는 학설을 퍼뜨려 제후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 "소식을 일으키다."는 말은 음양의 성쇠를 '사시의 위치'나 '분지의 절기'와 정확하게 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진나라는 추연의 '오덕이 전이된다'는 학설만 취하였기 때문에 학설의 종교적 요소와 과학적 요소 중 종교적 요소만을 계승하게 되어 과학적인 것은 사라져 버렸다.

 

 

[역서]에서 추연이 "소식을 구분하는 학설을 퍼뜨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추연이 정확하게 사시의 위치를 정리하고 분지의 절기를 바로 잡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추연의 과학적 지식이다.{사기} [맹자순경열전]에서는 추연의 학문을 "황고 대인들이 처음에 그 학술을 보고서는 놀라고 감화 되었으나 그 후에는 시행할 수 없었다."고 하여 놀란 것은 추연의 과학적 지식

때문에 놀란 것이고 시행할 수 없었던 것은 학설의 종교적 요소는 단지 미신이었기 때문이다.

 

 

4)오행과의 관계

(1) 오행의 의미{한서} [예문지] : "오행이라는 것은 五常의 드러난 기운이다."오행의 일반적인 의미 : 오행이 단지 만물을 형성하는 다섯 가지의 원소로서만 파악되고, 술수적인 의미는 없는 경우.오행의 술수적 의미 : 거기에 '천인상응'의 관념을 가미하여 인사의 길흉을 예측하는 것이다.(2) 술수에서의 오행과 [홍범] [홍범]의 '구주(九疇)'구주의 첫 번째 조목이 오행이다. : 오행의 "첫 번째는 수이고, 두 번째는 화이며, 세 번째는 목이고, 네 번째는 금이고, 다섯 번째는 토이다." 구주의 두 번째 조목은 오사이다. : 오사의 "첫 번째는 용모이고, 두 번째는 말이며, 세 번째는 보는 것이고, 네 번째는 듣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생각하는 것이다." 오사의 용모 말 보는 것 생각은 각각 오행의 수화목금토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예문지]에서는 "용모 말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마음이 흐트러지면 오행의 순서가 어지러워진다."고 한 것이다.구주의 여덟 번째 조목은 '여러가지 징조(庶徵)'이다. 이 징조 중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비오는 것과 맑은 것, 따듯한 것, 추운 것, 바람 부는 것' 등 다섯 가지 인데 이것 역시 오행의 수화목금토에 해당한다. 오사의 표현이 적당하다면 위의 다섯 징조가 정상적이 된다.엄숙하면 때에 맞추어 비가 내리고 일관도면 때에 맞추어 날씨가 맑으며 지혜로우면 ㄸ에 맞추어 따듯해지고 분별력이 있으면 때에 맞추어 추워지

 

 

고 성스러우면 때에 맞추어 바람이 분다. 이것이 바로 좋은 징조이다.광오하면 비가 그치지 않고, 일관성이 없으면 항상 볕이 들며, 게으르면 항상 덥고, 조급하면 항상 춥고, 우매하면 항상 바람이 분다. 이것은 나쁜 징조이다.

 

 

(3) [홍범]에 대한 한대 사람들의 찬입 [홍범]에서는 '오사가 바르지 못하면 단지 오행의 순서가 어지러워진다'고만 하였는데, [예문지]에서는 '오사가 바르지 못하면 오행순서가 어지러워지고 오성의 변란이 일어난다'고 하여, 오사의 다섯 가지 표현은 날씨에 영향을 주고 천체의 운행에도 영향을 주게 되어 부가된 것이다.한대에 이르면 오행설은 모든 자연의 이상현상들을 용모 말 보는 것 듣는 것 생각 등 오사와 관련을 지어 견강부회한 논의의 극치를 보여 준다.

 

 

(4) [홍범]의 과학적 성분[홍범]에 있는 과학적 사상은 '오기(五紀)'이다.[홍범] : "네번째 조목은 오기이다. 그 첫 번째는 세이고, 두 번째는 월이고, 세 번째는 일이고, 네 번째는 성신이고, 다섯 번째는 역수이다."구설에 따르면 세는 사시의 위치를 정리하는 것이고, 우러은 한 달의 초하루와 그믐을 정하는 것이며, 일은 해나 달, 별이 순행하는 도수를 바로하는 것이다.

 

성은 경성과 위성을 말하는 데, 경성은 항승으로 이십팔수를 가리키며, 위성은 행성으로 수화목금토 오성을 가리킨다. 신은 해와 달이 만나는 열두 개의 장소<十二次>이다. 해와 달은 매달 초하루에 서로 만나는데 그것이 서로 만나게 되는 곳을 신이라고 한다. 진한시대와 그 이후의 유자들은 종교적인 것만 계승하고 과학적인 것은 무시하였다. 그에 따라 허탄하고 괴이한 논의가 많이 나타났으며, 음양오행가의 학설을 결국 세상의 병폐가 되었다.

 

 

 

5) 잡점과의 관계

(1) 잡점의 의미{한서} [예문지] : "잡점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일의 상징을 정리하여 선악의 징후를 살피는 것이다."천문, 역보, 오행에 포괄되지 않는 것들은 모두 잡점에 포함되다.(2) 잡점의 사례{춘추좌씨전} [소공] 15년 : "……체제를 지내는 날에 재앙이 있을 것 같다. 내가 적색 흑색의 나쁜 기운을 보았으니 제사에 상서로운 조짐이 ……"전국시대에 이르러 종교적 사상은 더욱 부연되고 이론화되어 하나의 체계를 갖춘 우주관과 역사관을 만들게 된다. 이것이 후세에서 말하는 음양오행가이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추연이다.

 

 

 

 

3. 추연 학설의 내용

1) 음양소식(1) {사기} [역서]를 통해 본 역법에 대한 추연의 지식

추연의 "음양의 소식을 깊이 관찰하였다."는 의미는 "사시의 위치를 정리하고 분지의 절기를 바로잡는" 추연의 역법에 관한 지식을 포함하고 있을을 보여준다."소식을 일으킨다."는 것은 ㄸ의 직서와 음양의 성쇠를 올바로 배합하는 일이다. '소(消)'는 고갈되는 것, '식(息)'은 생장하는 것이다.[역서] "대개 황제가 성력(星曆)을 고정(考定)하고 오행을 건립하였으며, 소식(消息)을 일으키고 윤여(閏餘)를 바르게 하였다. ……"성력을 고정하다. : 천문에 근거하여 역법을 정하다.오행을 건립하다. : 금 목 수 화 토를 사방과 중앙에 배정.

 

 

(2) 한대 사람들의 '음양소식'한대의 유자들도 추연의 학설을 계승하여 음양소식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추연의 과학적 성분은 계승되지 않았다.① 동중서의 음양소식 음양이 유행과 성쇠를 통해 사시의 절기 그리고 날씨가 형성되는 원인을 해석.동중서는 '겨울'을 기점으로 음양소식을 설명"초겨울에는 양기가 서쪽에서 북쪽으로 드러난 상태로 움직인다. …… 한겨울이 되면 음양은 자방에서 만난다. 이 둘이 만나는 때가 동지이다.……"

 

 

② 동중서 학설의 문제점∼ 음양오행가의 학설에 따르면 서쪽이 가을이고, 가을은 음기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동중서에서는 음기는 가을에 동쪽에서 움직인다.③ 동중서의 음양설과 우가의 상인(尙仁) 권도(權道)정신동중서가 이러한 논리를 제시한 것은 이 학설에 기초하여 자신의 도덕철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공맹의 도덕철학은 자각하는 인간의 마음 위에 건립되며, 도덕적 가치의 근원은 인간의 마음에 있지 외재하는 사물에 있지 않다. 도덕적 가치의 근원은 마침내 자각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천의 의지로 전이되며, 천의 의지에 합치되는 것이 결국 도덕적인 것이 된다.천의 상도에 따르면 음기는 가을에 마땅히 서쪽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동쪽에서 움직인다. 동중서는 이것이 천의 '권도'라고 생각했다.

 

만약 음기가 가을에 서쪽에서 움직이게 되면 가을이 금, 숙살 곧 죽음을 뜻하므로 음과 금이 합해져서 숙살의 기운이 더욱 커지게 된다. 여름에 만물을 자라나게 했던 공은 그로 인해서 모두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동중서는 "가을에는 소음이 일어나지만 음이 금을 따르게 할 수는 없다. 금을 따르게 되면 화의 공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해의 공을 완성한다. '권도'에서 '권'은 저울의 추이고, 이 추를 앞뒤로 이동하여 무게를 잰다. 따라서 '권'은 변통한다는 의미이다.

 

 

④추연에 대한 [사기]의 평가를 통해 본 동중서{사기}에는 추연이 하탄한 논설을 만들게 된 동기를 두 가지로 본다. 첫 번째는 공자와 맹자가 정도를 고수하였기 때문에 제후들과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었다고 판단하여 "세속에 영합하고 제후들에게 구차하게 부합함으로써" 그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하였다는 측면이다.두번째 동기는 먼저 신비한 논의로써 제후들의 신뢰를 얻고 "나중에 그들을 대도로 인도하려는"데 있었다고 추측한다.동중서는 직접적으로 공맹의 학설을 천양하지 않고 음양가의 말을 빌어서 덜을 숭상하는 공맹의 정치사상을 발휘하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음양오행가의 학설이 보든 사람의 의식 속에 침투하여 있었고, 학자들과 왕공 대인들도 모두 그것을 신봉하였기 때문이다.

 

 

⑤ {회남자}의 음양소식∼ {회남자}의 음양소식은 동중서의 그것보다 간단하고 정합적이다. 후대에 음양소식을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회남자}의 학설을 계승하였다.

 

 

⑥ {역위계람도}의 '괘기'설일년 동안의 기후 변화가 음양의 소장에서 비롯된다고 파악.괘기설 : 음양의 소장을 64괘로 표시하여, 괘효의 변화를 통해 음양이 소장하는 모습을 표현.64괘 중에는 '사정괘(四正卦)'가 있다. 그것은 감(坎) 진(震) 이(離) 태괘(兌卦)이다.: 사정괘를 사방에 배치(감-북, 진-동, 이-남, 태-서)하고 각각 하나의 계절을 주관한다.각 괘에는 6개의 효가 배치되어 사정괘의 효는 모두 24개이다. 이것이 24절기를 주관.사정괘를 제외한 60개의 괘는 12개조로 나누어져 5개의 괘가 한 조가 되며, 각 조는 12달에 배치.

 

 

⑦ 괘기설의 '십이벽괘''십이벽괘'를 보면 그 배열은 11월에서 시작하여 다음해 10월에 끝난다. 그 순서는 ㅂ(復) 임(臨) 태(泰) 대장(大壯) 쾌( ) 건(乾) 구( ) 둔(遯) 비(否) 관(觀) 박(剝)곤(坤)괘의 순으로 되어 있다. 양이 생기기 시작하여 점차 양이 왕성하게 되고 양이 가장 왕성한 후에 음이 생기기 시작하여 점점 음이 왕성해지고 음이 극대한도로 왕성해진다. 여기서 일년의 기후 변화를 알고 음양소식을 알 수 있다.

 

 

⑧ 맹회의 괘기설∼ 24절기 외에 칠십이후(七十二候)라는 것을 두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역위}와 동일하다.

 

 

⑨ 경방의 괘기설60괘의 360효를 1년의 360일에 배분하고, 각각의 효가 하루씩을 주관.음양소식에 관한 한대 사람들의 논의에서는 추연의 과학적 성과는 계승되지 않고단지 기후의 변화가 음양의 성쇠에서 비롯된다는 점만이 긍정된다. {회남자}와 종중서는 모두 상상을 통해 음양이기가 유행하는 모습을 그려내었다. {역위}는 64괘를 통해 한 해 동안 음양이 소십하는 모습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며, 맹희와 경방 등은 {역위}의 학설을 계승하고 동시에 자신의 견해를 부가하였다. 이러한 견해들이 부가될수록 음양소식에 관한 논의는 더욱 번쇄해지고 더욱 허탄해 진다. 이것이 추연의 학설이 한대에 전해지면서 생겨난 폐단이다.

 

 

 

2) 기상과 그 법칙

⑴ 기상과 그 법칙의 의미기상이란 것은 길흉의 징조를 말한다. 천인상응은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졌는가?⑵ 신에 의한 '천인 상응설':[서경]의 [홍범],[금등]천을 주재하는 천으로 파악하고, 기상의 출현이 인사에 대한 천의 유의지적인 포상 혹은 경고에 의 해서 이루어 진다고 생각⑶ 기계적 '천인 상응설':[여씨춘추]천을 자연으로서의 천으로 파악하고, 기상의 출현이 인사에 대한 자연의 기계적인 감응에 의해서 이 루어진다고 파악 ⑷ 모순을 가진 '천인 상응설':동중서천인 상응이 신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때에는 기계적 감응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파악⑸ '천인상응설'에 대한 순자의 태도:순자천인상응설을 근본적으로 불신 3)오덕전이설

"천지가 갈라진 이래로 오덕이 전이함에 따라 통치에는 각각 올바른 제도가 있으며, 그 부응하는 것도 그와 같다."

 

 

(1) '오덕'과 '부응'의 의미오덕 : 우주에 존재하는 다섯 가지 상이한 성질의 힘으로서 일정한 순서에 따라 끊임없이 유행한다. 어떤 한덕의 도래와 소멸은 왕조의 흥망을 결정할 수 있다. 왕조의 변환이 오덕의 상호전화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부응(符應) : 오덕 중의 어떤 한 덕이 도래할 때 그 덕과 상응하여 자연계에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 부서(符瑞) = 서응(瑞應) = 부명(符命)

 

 

(2) 추연의 역사관추연은 단순히 오덕전이가 왕조의 변환이 아니라 그것과 음양소식을 서로 결합시켜 역법을 고정하고, 사시의 위치를 정리하고 분지의 절기를 바로잡았다.오덕종시의 설은 이기지 못하는 것을 따라 변화한다. 목덕이 있고, 금덕이 다음이며, 화덕이 또 다음이고, 수덕이 또 다음이다. 추연은 '오행상승'으로써 오덕이 전이하는 순서를 결정하였다.(3) 오덕전이설과 부응의 사례

 

 

① {여씨춘추}의 사례오덕이 전이되는 과정에서 어떤 덕이 주요한 힘으로 등장하면 자연계에는 반드시 그 덕이 주요한 힘으로 등장하였다는 '부응'이 나타난다. 명철한 사람을 어떤 '부응'을 보고서 어떤 덕이 등장하였다는 것을 알아차리며, 무든 행사를 그 덕의 특성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황제의 때에는 먼저 큰 지렁이와 큰 땅강아지를 나타나게 하였다.……" {여씨춘추} [명류]

 

 

② 진시황의 사례{사기}[진시황본기] : "진시황은 오덕종시의 운행을 추찰하여 주나라는 화덕을 얻었고 진나라는 주나라의 뒤를 이었으므로 진나라의 덕은 주나라의 덕이 이기지 못하는 것을 따른다고 생각하고 당시를 수덕이 시작되는 때라고 보았다. 한해의 시작을 바꾸어서 시월 초하루에 조하를 받고, 흑색을 숭상하였다. 수의 수인 육을 기준으로 생활하고 황하를 '덕수'로 이름을 바꾸었다. 물의 성질은 비정하고 잔혹하므로 진시황은 국사를 집행하는 것은 예외업이 업격하게 하며 일은 모두 법에 의해서 결정하였다."

 

 

 

4) 대구주설

(1) 대구주설의 내용

추연의 대구주설에 따르면 전체 중국은 천하의 구주 중의 하나에 속하며, 적현신주라고 한다. {서경} [하서 우공]에 기록된 우왕의 구주는 중국 안의, 곧 적현신주 안의 구주이다. 그것은 소구주라고나 할 수 있고, 대구주는 아니다. 중국은 단지 적현신주의 9분의 1에 해당하고, 적현신주는 천하의 9분의 1에 해당하므로 유자들이 말하는 중국은 천하의 81분의 1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 {사기} 원문의 잘못

{사기}의 원문에 "중국 바깥에는 적현신주와 같은 것이 아홉 개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여덟 개'로 바뀌어야 한다. 이유는, 대구주설의 내용상 적현신주를 포합하여 아홉 개이지, 제외한 아홉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천하의 90분의 1이 된다.

 

 

(3) 대구주설에 대한 한유들의 태도

한유들은 추연의 {대구주설}을 적극적으로 배척했다. 환관의 {염철론}에는 어사대부 상홍양이 유생들과 추연의 대구주설에 대해서 논하는 대목이 있는데, 그 곳에서 상홍양은 추연이 이 설을 제기한 목적은 유자들에게 천하의 광대함을 알려 주어서 전통의 관념에 속박되지 않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하였다.5) 추연 학설의 여운[봉선서]의 기록은 추연과 방사들의 상이함에 주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선술을 말한 사람은 송무기 등 방사이지 추욘은 아닐 것이다.

 

 

4. 음양오행설에 대한 여러 가지 시각1) '천인상응'에 대한 해석의 차이

{서경}[홍범]은 '천인상응'을 인사의 잘잘못에 대해 천이 희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여씨춘추}[명류]는 '천이상응'이 천도와 인사의 기계적인 감응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동중서는 이 두 가지이 주장을 모두 취하였다.

 

 

2) 오행의 순서에 대한 해석의 차이

추연은 오행상승에 근거하여 오행의 순서를 배열하였다. 토를 제일 처음에 놓아 이것을 이길 수 있는 목이 다음에 오고, 목을 이길 수 있는 금이 다음에 온다. 이렇게 하여 토목금화수의 순서로 배열, 순환한다. 진시황이 스스로를 수덕으로 파악한 것은 주나라가 화덕이었고, 수는 화를 이기기 때문이다.{한서}[율력지]의 기록은 오행상생을 표준으로 삼는다. "으뜸되는 덕은 목에서 시작한다." 그 순서는 목화토금수가 된다.

 

위나라는 [율력지]의 오행상생설을 근거로 하여, 화덕을 가진 한나라를 계승한 위나라는 토덕이라고 하였다. 한나라를 화덕으로 보는 것은 군주의 위압적인 규정에 의한 것이었으며, 음양오행가의 학설에서 볼 때에는 이론적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동중서는 "오행이라는 것은 ...붙어 있는 것끼리는 상생하고 하나를 격한 것끼리는 상승한다.({춘추번로}[오행상생])"고도 하였다. 이것은 동중서의 새로운 해석이다. 이것은 상생하는 가운데 상승의 관계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동중서는 음양오행화된 유자였다.

 

 

그래서 그는 왕조의 변천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삼통설'로써 오덕전이설을 대신한다. 삼통이라하여 흑통, 백통, 적통으로서, 흑통 뒤에 백통, 백통 뒤에 적통, 적통뒤에 흑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덕전이설'의 변형된 형태이다.[홍범]의 오행순서는 수 화 목 금 토로서 오행상생설과도,상승설과도 무관하다. 이에 대해 공영달은 "만물이 형체를 이룰때에는 미미한 모습으로부터 점차 뚜렷한 모습으로 진행된다."고 하였다. 수는

가장 미미한 모습을 띠고,화 목 금이 되면서 점차 뚜렷해져서 토의 형질은 거대한 것이다.

 

 

 

5. 한대 사상이 음양오행화된 이유

한초의 학술계는 여러 사상이 혼재 하였지만 비교적 도가가 득세하여, 도가의 청정무위사상이 유행하게 되었다.음양오행설과 유학의 결합은 동중서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표현되었다.{논어}에 "요임금이 '아, 순아. 하능의 역수가 너의 몸에 있으니 진실로 그 중을 잡아라.'고 하였다."라는 기사에서 음양오행가적인 색채가 {논어}에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용}에서는 "나라가 장차 흥하력 할 때에는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있고, 나라가 장차 망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요사스러운 징조가 있다."라 하여 추연의 '기상', 부응설과 같은 것이다.{맹자}에서는 "천하에 사람이 태어난 지는 오래 되었으니 한번 다스려지면 한번 어지러워진다."고하여 천하의 형세에 이러한 일정한 운수가 따라 순환하며, 인력으로는 바꿀 수 없음을 알 수 있다.유가 중에 음양오행가의 색채가 없는 인물을 순자 한 사람뿐이다. "하늘의 운행에는 항상된 법칙이 있으니 요임금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결왕 때문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천론편])"라 하여 천인상응설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고 있다.진나라가 추연의 학설을 채용한 이유는 그의 오덕전이설과 부응설이 당시에 이미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침투에 있었기 때문이다.한대의 인재 선발에는 묵가나 도가, 법가, 종횡가 등은 포함되지 않고, 음양오행학이 독립된 과목으로 설치되어 있었다.12가지 과목을 크게 분류하면, 유학, 음양오행학, 병학이 그것이다.이미

 

 

한대에는 음양오행설이 유행하였으므로 천자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신봉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음양오행설은 정권담당자의 신뢰를 받았으므로 유자들이 음양오행설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을만 했다.추연이 자신의 학설을 통해 표방한 것은 결국 공맹이 중시한 것과 동일하다. 공자와 맹자는 정치의 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수신과 인륜을 중시하였다. 인의와 절약, 군신과 상하와 육친 간에 시행해야 하는 도를 행하는 것이다.

 

 

 

6. 한대 음양오행설의 유폐사마담의 [논육가요지]에서만 해도 음양오행가와 방사는 별개의 것이었으나 {한서}에서는 "인사를 버리고 귀신에 의지하였다."는 말이 있어 추연의 학설이 한대에 와서 점차 왜곡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음양오행가와 방사가 결합하기 시작하였다. 방사는 煉丹術과 신선술 그리고 祈禳術을 말하는 사람들만을 가리킨다.

 

 

이 세가지는 모두 방사의 특징이지만 특히 기양술은 본래 음양오행가의 학설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한유들이 언급하였다. 한유들은 이런 식으로 음양오행설을 논함으로써 잘못된 길에 빠져들었다.참서(讖書)는 비밀스러운 말로써 길흉을 예언하는 책이다. 음양오행가도 '기상'과 '부응'에 대해서 말하여 길흉을 예언하였다. 이것이 근거하는 것은 자연계의 현상이며 비교적 추상적이었는데 후대 예언가들에 의해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한대에 참서가 유행하게 되었다.위서(緯書)는 본래 참서와는 다르다.

 

 

 경학자가 음양오행가의 말을 통해서 경전을 해석한 것이 위서이다. 이러한 위서가 점차 참서와 별로 구별없이 되어버렸다. 결국 참서와 위서 중의 참서와 같은 황당한 부분은 모두 음양오행설에 관한 한유들의 논의로부터 생겨난 유폐하고 할 수 있다.어떤 자연현상이 인사의 길함을 반영하는지 흉함을 반영하는지에 대한 음양오행가의 해석을 보면 그것은 주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아무런 준칙도 없다. 똑같은 현상을 가지고 한 군주를 탕무와 같다고 칭송할 수도 있고, 걸주와 같다고 비난할 수도있는 것이다.

 

 

 

동중서, 경방, 유향 등은 막강한 지위에 있었으니 그들의 의견은 모두 인민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들은 음양오행설을 신뢰하여 자연계의 이상현상을 군주가 실덕하고 국운이 다한 징조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논설들은 조정과 인민의 관계를 격리시켜 놓는 고도의 작용을 하기에 충반하였고, 조정에 대한 인민들의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조장하였다. 전한 왕조의 멸망에는 이것 역시 하나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대중국의 학파는 십가로 분류되는데 이중 하나가 음양가이다. 이 음양가의 대표적 인물이 추연이다. 그는 과학적 지식과 미신적인 사상을 함께 논하였다. 추연이 미신적인 설법을 제시한 목적은 군주와 관리들을 경계하여 인민을 사랑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삼가도록 하는 데 있었다.

 

 

 

 

유물론적 요소를 가진 음양오행가의 세계관 풍우란(馮友蘭)

1. 음양오행가에 관하여

한대 사람들은 무술과 과학이 혼합되어 있는 것을 '술수'라고 한다. 전국시대에 '술수'를 기초로 발전되어 온 철학 유파가 있었는데 이들을 한대 사람들은 음양오행가 혹은 오행가, 음양가라고 하였다. 이들 음양오행가들은 과학 특히 천문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 천문학은 농업생산에 종사하였던 노동자들이 오랫동안 경험을 통해서 축적한 지식체계였다. 그러나 오행가의 사상에는 많은 종교와 무술, 미신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고대 술수의 특징이다.

 

 

2. 오행에 기초한 [홍범]의 자연관[홍범]에서는 상제가 낙수와 황하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있는 글인 '대법'을 하사하였다고 인정하고, '복서'의 기능을 인정하므로써 왕권의 신성함을 성양하고, 상제의 지위와 권위를 긍정하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오행의 관념을 사용하여 일련의 자연현상과 사회현상 그리고 정신현상을 분류하였고, 그것이 인식한 세계의 질서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홍범]에서는 자연계에 수화목금토 등 인간 생활에 필수적인 물질이 있고,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도 크게 보아 다섯 가지로 분류가능하고 그것이 오행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천시의 측면에서도 五紀(세,월,일,성신,역수)가 있다고 하였다. 또 오사(용모, 말,보는 것,듣는 것,생각하는 것)와 오복(장수하는 것,부를 누리는 것, 건강하고 편안한 것, 덕있는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것, 깨끗이 죽는 것)도 언급하고 있다.

 

 

3. [월령]의 세계관[월령]은 자연계와 사회 속의 많은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데,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이 일부는 과학이고, 일부는 무술과 종교이다. 이것은 {管子}의[幼官]과 후대에 {大戴禮記} 속에 편입된 [夏小正]이 종합 발전시킨 것일 것이다. 여기서 '유관'은 '현궁(玄宮)'의 오기임이 후대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현궁이란 '명당'을 말하는 것으로 고대의 통치자가 종교적의식을 거행하고 정책을 반포하던 곳이다. '명당'은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사회와 정치제도를 대변하며, 많은 고대의 종교적 미신을 포함한다.[월령]은 춘추전국시대 이래 축적된 계절의 변화와 농업생산의 관계에 관한 경험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총결하고 있으며, 또 중국 고대 천문학과 농업생산에 관한 지식의 수준을 반영하고 있어, 중국과학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월령]의 작자들은 위의 경험을 총결하는 과정에서 사계절의 변화와 농업생산의 관계에 대해 이론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어 철학적 의의도 가진다.[월령]에서는 일년의 사시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오행의 성쇠가 하나의 이유가 된다고 인식한다. 음양오행가의 설에 따르면 사시의 변화는 '오행의 상승'의 순서로 진행된다고 하였다.

 

 

화덕이 왕성한 때가 여름이고, 물은 차갑고 얼음으로 변하면 더 차갑기 ㄸ문에 수덕이 왕성한 때는 겨울이라고 한다. 또 봄은 모든 초목이 생장하니 바꾸어서 보면 목덕이 왕성한 때가 봄이다. 금속은 병기 등의 살상의 기능이 있으므로 금덕이 왕성한 때가 가을이다. 이와 같이 [월령]은 다섯 가지 묵질의 속성과 상호작용으로 사계절을 설명하고 있으니 이것은 유물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또 [월령]에는 오행의 성쇠뿐만 아니라 음양이기의 쇠퇴와 생장도 사시의 변화에 관여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유물론적 관저모가 마찬가지로 자연계의 고유한 두가지 대립적인 물직세력의 특성과 작용을 통해 사시의 운행과 만물의 생장변화 과정을 설명하고, 음양오행가는 한가지 이상의, 상이하고 대립하는 물질의 특성과 작용을 통해서 자연현상의 변화과정과 원인을 설명하였다.

 

 

그것은 변증법적 요소를 가진 것이며, 복잡한 자연현상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유리하다. 이것은 고대 유물주의 사상사에서의 일대 진보였다.음양오행가의 설을 보면, 포상의 조치는 양기가 왕성할 때 거행하는 것이 가장 좋고, 형벌의 조치는 음기가 왕성할 때 거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것이 같은 종류에 힘입어서 일을 추진하는 것이고, 순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반 음양소식의 큰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4. 추연의 지리설과 역사관추연(鄒衍:B.C.305~B.C.240)은 전국시대 말기를 살았던 오행가의 주요한 지도자이다.추연은 "음양의 소식을 깊이 관찰하여 괴이하고 우활한 학설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지리설의 방면에서 추연은 중국이 단지 전세계의 81분의 1일 뿐이라고 생각했다.{사기}에서는 추연의 사유방법이 "먼저 작은 사물에서 징험하고 그 결론을 유추, 확대하여 무한한 곳까지 도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유방법은 기존의 지식으로부터 미지의 세계를 추론하는 것이며, 그의 추측도 일정한 경험적 기초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추연의 지리설은 인간의 마음을 확대시켰다. 그의 학문방법과 주장에는 일정한 과학정신과 유물론적 의미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5. 음양오행사상이 중국의 철학과 과학 발전에 미친 영향중국 고대과학 발전사에서 볼 때 음양오행사상은 고대 천문학, 의학, 화학의 발전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고대의 과학자들은 음양과 오행을 상이한 성질을 가진 물질적 원소로 파악하여 물질의 구성을 설명하기도 하였고 혹은 음양오행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물질현상의 상호연관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6. 음양오행가에 대한 평가와 비판자연계와 인류사회가 동류적인 것이라고 파악하는 견해를 추론해 보면 두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하나는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파악하는 방법을 중시하여 인간을 일종의 자연물로 보고 자연계의 법칙을 통해서 사회와 역사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으로부터 자연을 파악하는 방법을 중시하여 자연현상을 인간화시키고, 자연계에서 가능한 힘들을 의식과 의지와 목적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한대 이후 음양오행가의 발전도 이 두 노선에 따라 진행되고 분하되었다. 고대의 술수는 본래 과학과 무술이 혼재된 것이었다. 음양오행간,ㄴ 술수로부터 발전되었기 때문에 유물론적,과학적 요소도 가지고 있고, 동시에 관념론적, 종교적 요소도 가지고 있다. 자연관의 측면에서 볼 때 전국시대 음양오행가에서는 유물론적 성분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진한대 이후 분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두 개의 대립적인 노선이 형성되었다. 그 한 노선은 자연과학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면서 원래의 신비주의적 성분, 특히 '천인감응'의 미신을 포기하고 유물론의 길을 따라 힘차게 달려 갔다. 다른 한 노선은 전국시대 이래 음양오행학설에 내재해 있던 신비주의 성분을 발전시키고 원래의 유물론적 관점을 포기하면서 종교적 미신과 더 굳게 결합하였다.

 

 

 

 

진한사상과 음양오행설 이택후(李澤厚)

 

진한사상은 음양오행을 통해 구축된 체계론적 우주관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1. 도가 법가 음양가 유가의 통합선진시대의 名家와 墨家가 쇠퇴하고 유가, 노가, 법가, 음양가가 진한시대의 새로운 의식형태를 구축하는 4대 사조였다.유가사상이 점차 다른 세 학파의 사상을 융합함으로써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였고, 점차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자리잡았다.순자와 {역전}에서 법가와 음양관념에 대한 흡수를 볼 수 있다.

 

 

{여씨춘추}에서 자각적으로 제자백가의 사상을 종합함으로써 사상적 통일을 구하려고 하였다."이 책이 숭상하는 것은 도덕을 표적으로 삼고, 無爲를 기강으로 삼고, 仁義를 규칙으로 삼고, 공정하고 바른 것을 격식으로 삼은 것이다." <한대의 고유(高誘)>{여씨춘추}와 원시유학의 차이점.여씨춘추:통일 제국과 전제군주의 통치질서라는 측면에서 입론공리적 필요황족통치에의 복종을 요구하는 정치적 목적+법가의 정신이 침투원시유학:씨족 귀족의 개체 구성원과 종법적 유대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입론윤리적 정서씨족 구성원의 혈연관념과 심리 기초위에서 건립

 

 

{여씨춘추}는 법가의 실질적 정치노선에 대한 오랫동안의 실천이라는 경험적 기초 위에서 그리고 새로운 사회기초(후기 노예제)와 정치구조(통일전제제국)의 요구에 따라, 유가의 혈연씨족 체계와 관념을 보존함과 동시에 개조하였다.유가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이유?다른 학설과 비교해 볼 때 유가가 중국의 전통적인 경제사회적 전통과 보다 깊은 현실적 연관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은 한때 유행하였던 순수한 이론적 주장이나 공허한 환상이 아니라 매우 오래 된 씨족혈연의 종법제도를 자신의 확고한 기초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가족적 소생산 농업을 경제의 단위로하는 사회에서는 항상 현실적 역량과 전통의 유효성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도가가 새롭게 해석되었다.

 

 

도가의 자연-정치이론, 이른바 '무위'가 이 시기 새롭고 실재적인 함의를 가진 이론을 통해 해설.도가의 우주관은 어떤 현실적인 정치경제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철학적으로 '인간(정치, 사회)'을 '천(자연, 우주)'과 연결 융합시켜 통일제국의 상부구조를 위한 이론체계를 위한 이론체계를 마련함으로써 선진시대의 원시도가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가졌다.{회남홍렬}우주 시공의 창조와 변화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현존하는 사물의 형태와 변이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며, 객관세계의 다양성과 복잡성, 변화가능성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인의를 배척하고 유가를 질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도가의 모습으로,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여 나타난 이 새로운 체계속에 여전히 유가의 특징이 침투되어 있다.

 

 

 

 "무위라는 것은사사로운 뜻이 공도(公道)에 들어오지 않고, 욕심이 올바른 술법을 왜곡하지 않으며, 이치에 따라 일을 하고, 바탕에 따라 공을 세우는 것이다."어떻게 객관적 자연법칙의 준수라는 법칙(도가와 음양가가 중시한 것)과 주관능동성의 발휘라는 경향(유가, 법가가 중시한 것)을 결합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한대사상이 처리해야 할 중요한 문제였다.이러한 상황에서 천문과 역법의 규칙을 이야기한 음양가와 자연법칙의 준수를 강조한 도가가 사회의 정치체계를 구축하는 외재적 골격이 된 것이다.

 

 

동중서의 {춘추번로}정신 실질의 측면에서는 {여씨춘추}의 방향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동시에 인사 정치와 천도의 운행을 견강부회적으로, 그러면서도 강력하게 결합시키려고 하였다. 특히 음양가를 뼈대로 하는 체계의 틀을 밖으로 돌출시키고, 음양오행(천)과 왕도정치(인)의 일치와 상호영향을 강조하는 이른바 '천인감응'을 이론의 축으로 하면서 그것을 둘러싼 모든 것을 전개시켰다.인격적 천(하늘의 뜻)이 자연적 천(음양, 사시, 오행)에 의거하여 자신을 두러낸다고 생각했다.+-인격적 천:종교로부터 유래| 신비적 주재성과 의지성,목적성 +-자연적 천:과학(천문학)으로부터 유래기계적이거나 반(半)기계적동중서의 공헌 : 유가의 기본 이론을 전국시대 이래 게속적으로 유행하였던 음양가의 오행우주론과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배합시켜서 유가의 윤리강상과 정치강령에 체계론적 우주도식을 그 기초로 제공하였으며, 유가를 위주로 제 학파를 융합함으로써 하나의 체계를 완성하였다는 것.

 

 

 

2. 천인우주론의 도식

동중서의 천인이론(天人理論) '천'을 우주와 인간의 최고 주재자로 보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른 요소(천 지 인 음 양 오행)들과 연관 배합되어 있는 결합체로 파악했다.'천'은 한편으로 주재자, 곧 대군이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의 요소이기도 하고, 또 결합된 구조 자체이기도 했다.동중서의 오행우주론은 완전히 정치 강상과 사회제도의 측면에서 착안된 것이다.정치와 자연법칙에 종류별로 같은 모습, 같은 서열 구조가 존재하며, 따라서 그것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배합된다.오행 운행의 기게론과 천을 주재로 하는 의지론 혹은 목적론을 혼합시켰으며, 그러한 체계에서 '천'의 이중적 성질(신학적 인격신과 자연적 물질성)은 기계론과 목적론의 합일로 전개되고 있다.군주의 전제권력과 사회의 통치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 질서를 오행의 도식이라는 누구도 초월할 수 없는 보편적 틀 속에 위치지었다. 이는 '인의'를 우주론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려 절대군권을 제약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중서의 우주론은 사회적 방면에서 '효제'와 '입고 먹는 것'을 강조.가족적 소생산농업 경제라는 당시의 사회적 구조가 요구한 것이다.정치적 방면에서 문관체제의 건립에 적극적이었다.통일제국의 입장에서 고안된 관료체계를 필요로 했다. 고로 정치윤리와 통치체제를 우주 자연의 질서에 투영하여 건립.{여씨춘추}가 유가의 정신을 통해서 법가를 변환시켰고,

 

 

{회남홍렬}이 유가의 정신을

도가 속에 침투시켰다고 한다면, 동중서의 특징은 상당히 자각적으로 유가의 정신을 통해서 음양가의 우주체계를 개조하고 이용하였다는데 있다.동중서는 음양가를 어떻게 개조하였는가?유가의 인의학설과 적극적인 행위관념을 통해서 사람들을 피동적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음양가의 경향을 개조한다. 동중서의 음양오행 우주체계에서는 객관적 구조의 법칙이 강조되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주동적 정신도 충만하다."선은 쌀과 같고, 본성은 벼와 같으니 벼는 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동중서의 인성론> 동중서의 천인감응 : 인간이 천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인사가 천의(天意)에 영향을 줄 수 있다.사람은 능히 천지와 함께 셋이 된다.유연성을 중시하였다.반드시 확정된 원칙성(經)이 있고, 또 반드시 원칙이 허락하는 유연성이 있다.이는 동중서가 중시한 것은 전체체계구조의 안정과 지속이지 어떤 세부적인 것의 불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전체구조의 동태적 평형이지 현상의 고착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공자의 인학속에 들어 있는 정감의 심리원칙을 우주체계속으로 끌어들여 자연을 정감화 했다.'천'은 자연성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도덕성도 있으며, 신학성과 정감성도 가지고 있다.

 

 

 

3. 음양오행의 체계론 진한시대의 음양오행사상은 [의식형태]와 [과학적 진리(혹은 학술사상)]가 결합되어 상호 침투되어 있었다.이성과 비이성이 상호 상이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즉, 체계의 객관적 운용을 강조하는 것과 신비적인 천인감응론을 강조하는 것으로.두 방면, 즉 '신비적 교의'와 '경험적 지식에 대한 모종의 과학적 조직, 개괄, 정리'는 상호침투한다. 오행과 음양의 결합[음양가]가 가장 먼저 시도.음양과 오행의 결합이 이루어짐으로써 오행의 구조 조직은 두 가지의 내재적인 보편적 동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오행구조는 확실하게 자기운동과 자기조절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오행에 '상생', '상승'이라는 구체적인 운동이 있을 수 있는것은 상호의존 상호보완하고 또 소장하는 두 가지 공능 혹은 모순 역량으로서의 음양이 끊임없이 추동하기 때문이다.음양은 오행 밖의 독립적인 힘이 아니라 오행의 원동력으로서 오행과 함께 서로 합하여 공을 함께 한다.음양 : 특정한 성질을 가지고 상호대립 상호보완하는 개괄적 경험 기능과 힘.오행 : 다섯가지 물질적 요소나 재료 혹은 실체라고 하기보다는 다섯가지 작용과 기능, 힘, 순서 그리고 효과.동중서의 음양오행체계론의 특징어떤 개별적인 기능이나 힘, 성질이 아니라 전체의 체계구

조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요한 특면이다.

 

간단한 단선적인 인과율이 아니라 이 체계속에 있는 모든 기능과 힘의 상호작용이 이 체계의 유기적 생명을 유지하는 관건이 된다.전체체계는 운동 변화하는 힘의 동태적 평형 속에 위치하며, 그에 따라 자기조절의 성격을 갖는다.이 체계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므로 체계의 안정과 지속을 뛰어 넘거나 파괴하지 않는다.이 체계의 전체에 대한 파악은 분석적 처리를 거치지 않은 포괄적 직관이라는 원시적이고 소박한 수준에 머문다.음양오행체계론의 과학적 성분일정 정도 사물의 객관적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 일정정도 효과있게 생활에 응용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의학]중국의학은 기능과 구조의 전체 체계에 대한 파악 위에 건립되었다.생물 유기체가 생장 발전하는 동태적 평형상태와 자아조절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면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며, 설명하고, 치료할 것을 요구한다.구조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의 동일함에 따라 이질적인 사물이 상호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인식한다.

 

 

 

4. 오행도식의 역사적 영향참위신학(讖緯神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침.중국 사회사상과 관념체계의 허다한 영역, 허다한 방면에 침투하였다.추상적 사변을 통한 사물의 본질성찰에 이르지 못하고, 경험론의 이성적 수준에 머무르게 했다.미성숙한 {체계론적 우주도식}은 [쳬쇄성] [순환성] [질서성]의 특징을 갖는다.폐쇄성 : 인간의 심리와 성격에 자기만족감을 부여하고, 그것은 과대망상과 보수적 태도로 표현되며, 원래의 체계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밖에서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낳는다.순환성 : 진정한 진보를 부정이며, 전향적인 것이 아니라 복고적인 것에 불과하다.질서성 : 명분과 자족의식, 숙명론적 태도를 동반하며, 어떤 인간의 노력도 이미 정해진 질서 도식의 규제와 제약을 받는다는 인식을 낳는다

 

.{체계론적 우주도식}이 갖는 긍정적 측면.페쇄성을 가지면서도 관용성과 유연성도 함께 가진다.순환론은 한편으로 풍부한 인내심과 분투정신의 기초가 되었다.질서성은 전체적인 국면을 파악하여 극단으로 흐르지 않아야만 전체적인 평형을 획득하고 생활과 신체, 인간관계의 화해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변증법적 모순관 형성의 논리적 과정- 춘추전국시대 오행,음양,중화,일양 범주에 대한 연구 궁철병(宮哲兵)변증법적 모순관의 형성의 특징경제적 변혁과 생산,과학 수준의 제고에 영향을 받은 것이며, 지접적으로는 계급투쟁과 정치투쟁에 근거한 거이다.상대적 독밉성과 앞선 새대의 사상 자료에 대한 계승성을 가지고 있다.그당시의 논리적 연구방법 --> 개졈과 범주의 운동을 더듬어 가면서 철학적 사유의 발전법칙을 탐구하는 방법

 

 

 

1.오행범주

'오'를 강조하는 관념이 먼저, 오행관념이 나중에 나타났으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오'를 강조하는 관념이 오행관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오행관념이 '오'를 강조하는 간념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오행관념과 '오'를 강조하는 관념은 본래 두가지 상이한 관념이다가 은주교체기에 이르러 비로소 결합되었다.오행범주는 오행관념과 '오'를 강조하는 간념의 결합을 특징으로 하며, 그것의 철학적 가치는 천지만물 사이에 존재하는 보편적 연관에 대해 초보적인 분류룰 시도하였다는 데 있다.오행범주의 발전은 대략 오행 상잡설, 오행상승설, 오행무상승설, 오행상생설, 오행상생상승설, 등의 단계를 거친다. 오행상잡설 : 서주시대 말기의 사백에 의해 제시되었다.--> 세계는 풍부하고 댜채로우며,단일하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ex) 다섯가지 맛을 배합하여야만 음식이 입에 맞을 수 있고, 사지가 서로 긴밀히 열결되어야만 몸을 보호할 수 있다.오행상승설 : 춘추시대 말기의 사상가들이 오행중에서 어떤 한 항과 나머지 네 항의 차이와 연관을 인식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각각의 항과 그에 대립하는 다른 한 항의 차이와 연관, 즉 '본질적 차이'와 '대립'의 연관을 인식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오행무상승설: 오향상승설 속에 존재하는 신비주의적 요소와 절대화의 경향을 극복하고 그 조건도 연구하는 발전을 추동하여 나온 것. ex)'요점은 마땅한 데에 있다.'--> '

 

 

 

마땅함'은 적당량을 가리키며, 그것은 '이기거나' '이기지 못하는'조건의 하나이라는 것.오행상생설: 관자의 '유관','사시','오행','경중기'등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오행을 사계정의 변화에 배합시키고 오방, 오기, 오색, 오음, 오미등도 그 체계속에 편입시켰다.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상이한 내용의 정령을 시행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오행상생상승설: 전국시대 후지에 들어와 탄생. 대표적 인물은 추연이다. 이것으 특징은 당시의 사상가들이 상호배척하고 상호제약하는 오행의 대립적 연관을 인식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상호의존하고 상호추동하는 오행의 동일성적 연관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오행의 모순관계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알수 있다.이는 중국 고대의 변증법적 사유가 보편적 연관에 대한 인식을로부터 모순 대립면으 ㅣ연관을 파악하는 것으로 진보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2. 음양범주

음양개념의 형성: 주나라 초기 서주시대 말기에 음양개념과 기개념이 결합되면서 양기,음기라는 개념이 나타나게 된다.이때의 기는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원소가 아니라 우주만물의 운동,변화를 낳는 원인이였다.음양동인설:음양개념과 기 개념의 결합을 특징으로 하며 철학적가치는 사믈이 운동하게 되는 원인을 설명하였다는데 있다.육기균형설: 음양풍우회명의 속성이 차이가 있으면서도 평형을 유지하는 것.음양상극설: 일식현상에 의거하여 각각 수재 혹은 가뭄의 출연을 예측한 것의 예. 그들이 주목한 음양이기 사이의 대립성및 대립으로 인해 야기되는 지위의 전화는 철학적의미를 갖는다.음양전화설: 양기의 발전이 극에 달하면 다시 자신의 반대면을 향하여 움직이고 음기에게 자리를 물려준다.

 

 

사물은 반대면으로 전화될 떼를 유추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그러한 때를 포착하여 사물을 유리한 방향으로 전화시켜야 함을 지적.음양소장설: 전국시대의 제나라에서 유행.음양상화설: 전국시대의 초나라에서 유행.음양상화설은 육기균형설을 발전시킨것으로 균형을 이루는 '육기'가 대립적인 '이기'로 개괄되고, 대립적인 '이기'가 조화를 이룬 '일기'로 개괄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음과 양의 사이에 구별관계가 대립관계로 개괄되고, 다시 더 나아가 대립과 통일의 관계로 개괄됨을 보여준다.당시의 사상가들은 점차로 사물 내부의 두 가지 힘 음양사이에는 상호투쟁과 상호전화ㅡ상호의존, 상호결합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인식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우리는 춘추전국시대 음양범주의 역사적 발전이 운동,변화에 대한인식으로 부터 내재적 모순을 파악하는 데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사유의 논리적 과정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수있다.

 

 

 

 

3. 화

은주시대의 화: 화목과 협조, 마음과 덕을 같이 하는 것, 단결의 의미를 가진다.춘추전국시대의 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화'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 맹자 공손축하'화'범주의 발전은 타화설, 부화설, 중화설등의 단계를 거친다. 서주 말기의 사백: 조화야말로 실제로 사물을 낳는 근거이며, 완전히 동일하면 생산이 계속되지 않는다. 세계가 다양성의 통일이며, 사물은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타화설로 개괄이 가능하다.현재 중국에서 발표된 논저 중에는 이 명제가 대립물 통일의 사상을 표현한다고 보고있다. 이는 다양성의 통일 사상이며, 거기에는 대립물 통일 사상의 맹아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춘추시대 후기: '가''부'의 상호대립과 상호의존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부화설'이 나타난다.--> 대표적 인물은 晏纓이다. 안영은 사백과 마찬가지로 '화'와 '동'이 상반된 의미를 가지는 두가지 개념이라고 생각하였다. '동'이라고 하는 것은 임금께서 옳다고 하는 것은 양구거도 옳다고 말하고 임금께서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양구거도 옳지 않다고 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동'의 철학적 함의는 무차별의 동일성 혹은 추상적 단순성의 동일함이다. 또한 '화'라고 하는 것은 다양성과 다양성의 통일을 표시하고, 대립물의 존재와 대립물의 통일을 표시한다. 여기에는 맑음과 탁함, 집어넣음과 덜어냄,

 

 

 

 

모자람과 지나침, 옳은것과 옳지 않은것, 완성함과 물리침등 십여 개의 대립에 관한 개념이 나타난다. 다양성의 통일로서 안영의 '화'는 사백의 '화'개념을 계승한 것이며, 대립물의 통일로서 안영의'화'는 사백의 '화'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주목할만한 것은 안영의 '부화설'가운데 이미 '중'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인데 이는 안영의 부화설이 '타화'로 부터 '중화'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형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화학설을 가장 먼제 제기한 것은 공자였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중용의 도이다. "군자는 화합은 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은 하지만 화합하지는 않는다. ;논어 자로" '화'에 대한 공자의 인식은 안영을 뛰어넘는 면모가 있어서 '강함'과 '부드러움'의 보완이 잘이루어지면 '화의 지극함'곧 가장 적절한 '화'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가장 적절한 '화'의 상태를 중이라고 한다.공자의 중화학설은 "대립면이 어떻게 해야 같아 지는가"하는 문제를 탐구하는데 귀중한 공헌을 하였다.

 

 

이는 네가지의 일반적인 사유형식으로 표현된다고 인식되는데 순자의 중화사상을 결합시켜 대립면이 어떻게 상호연결되는가를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A이면서 B이다: [순자;왕제편] "법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논의하고 직무에 대한 규정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응용한다"는 것은 '법'과 '직무'의 완전하지 못한 점은 반드시 그 데립면인 '논의'와 '응용'을 통해서 보완해야 한다는 의미

를 가진다.

 

 

 이는 곧 대립면을 직접 결합시켜 이것의 장점으로 저것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다.A이면서도 B가 아니다: [순자;불구편] 관대함,청렴함,분변함 등의 미덕은 언제든지 자신의 대립면으로 전환될 수 있으므로 반드시 테만하지 않음, 남을 헤치지 않음, 다투지 않음등으로 관대함, 청렴함, 붐변함의 결점을 보완하여 그것이 극단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A도 아니고 B도 아니다: [순자;해폐편] 중화사상의 전형적인 형식-두개의 극단을 잡아서 그 가운데를 선택하는 것- 이다. 양단을 연결시키고 배합하여 과불급이 없이 법도에 적중할 때만이 두 개의 극단을 잡아서 그 가운데를 선택하였다고 할 수 있다.A이기도 하고 B이기도 하다: [

 

 

순자;불구편] 유가는 "때에 따라 처신할 것"을 주장한다. 곧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여 상반된 대책을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적 순서로는 A이면서도 B인것으로 표현된다. 즉 대립면의 상호보완과 상호협조이다. 중화학설의 결점대립의 전개를 법도의 범위 이내에 한정하였고, ②전화의 필연성과 필요성을 부인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 대립을 소멸시키고 모순을 용해시키는 조화주의 사상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중화학설이 음양학설, 오행학설과 마찬가지로 중국 고대 변증법사상의 중요한 구성요소중의 하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4. 일양

은주시대에는 이미 '이'를 배척하고 '일'을 숭상하는 정치관념이 존재하였다.춘추전국시대에는 군권의 쇠락과 제후들의 쟁패로 인해 정치적인 통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 조응하여'일'을 숭상하는 전통적 관념도 점차 붕괴되어 갔다. 이는 그것의 대립면 '불일'관념의 유행을 낳았다.-->이는 서주시대 말기 "이익을 독점하고", "부화뇌동만을 일삼는" 것에 반대하는 정치투쟁에서 발단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불일관념이 비교적 유행하였는데 정치 방면에서 상양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하나가 아니다"라고 하였고 의학 방면에서 자선은 "군자에게는 하루에 네가지 때가 있다. 아침에는 정무를 처리하고, 낮에는 신하들의 의견을 들으며, 저녁에는 정령을 고치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 ......

 

 

 

이제 당신네 왕께서는 그것을 무시하고 오로지 하나에만 열중하기 때문에 병에 걸린것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또 인식론의 방면에서는 [관자;주합]에 "한마디 말에서 분변하고, 하나의 이치만 살피며, 하나듸 일만을 일삼는 자는 한쪽으로 편단된 학설을 내세울 수는 있어도 넓게 포괄할 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사으이 예를 통해서 보면 이른바 '일'은 단일성, 무차별성을 가리키고, 이른바 '불일'은 차별성과 다양성을 승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이'를 숭상하는 관념은 불일관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전통적인 정치관념에서 신하는 군주를 '보좌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곧 신하는 군주를 보좌하고, 군주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춘추시대가 되면 이러한 전통적 관념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예를 들어 '진 헌공'은 전통적인 관념에 따라 '이'를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절대 복종관계로 인식하였다. ---> 그에 대해 대부였던 사위는 진 헌공에게 '이(보좌하는 사람)'는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절대 복종관계가 아니라, 대립면의 배합과 협조를 의미하는것을 깨우쳐주려고 했다. '이'를 숭상하는 사위의 학설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함의는 무차별의 동일성에 대한 반대와 대립면의 통일에 대한 주장이다. 곧 사위는 신하는 군주의 보좌관이기 때문에 절대복종하는 단계에서 안주할 것이 아니라 대립면으로서 군주에 대해 '간언을 하여 그의 행동을 관찰하여야'한다고 생각하였다.'이'를 숭상하는 사광 학설의 함의는 각 사물에는 대립면을 설치하여야 하며(그를 위해 보좌하는 사람을 둔다), 그 대립면의 목적은 "법도를 넘지 않도록 하는 것", 곧 사물이 극단이 아니라 그 반대면을 향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에 있다.--> 대립면의 주요한 관계는 배합과 협조의 관계였으나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격렬한 대항과 투쟁의 관계로 발전될 수 있다.사묵은 "사물이 태어날 때에는 양면을 가지고 있다"는 뚜렷한 변증법적 명제를 이야기 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모순하는 두 측면 중의 부차ㅈ 측면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사묵은 한발 더 나아가 모순하는 두 측면의 주요하고 부차적인 지위가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방향으로 전화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비교적 모순하는 두 측면의 투쟁성을 강조하여 [역경;대장괘]의 괘상,곧 "뢰가 건을 탁것"을 인용하여 단지 투쟁을통해서만이 전화가 이루어짐을 설명하고 있다.사묵과 동시대 혹은 약간 후대에는 공자의 '양단'설과 등석의'양가'설 그리고 [주일서]의 '삼양'설이 나타난다. '삼양설'에서는 "뜻을 의심할 때에는 양면에 입각해서 하며, 양면을 판단할 때에는 제삼의 기준을 가지고 한다"고 하여 인식의 정확성 여부는 반드시 그것과 대립하는 관점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하며,

 

 

두가지 대립하는 관점의 비교를 통해 장단점을 보완한 이후에야 더욱 완전한 인식이 나올수 있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새롭게 '일'을 숭상하는 학설이 등장한다. [국어],[월어하]에는 "오직 땅만이 만물을 포용하여 하나로 한다"라는 말이 있고 [노자]39장에도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청명하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고,신은 하나를 얻어서 영묘하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서 충만하고, 만물은 하나를 얻어서 태어나고, 임금은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바르게 한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하나'란 기를 의미한다. -->'일'을 숭상하는 새로운 학설은 사백이 가장 먼저 제시한 불일관념에 대한 부정이며,불일관념은 추상적 동일성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므로 '일'을 숭상하는 새로은 학설은 추상적 동일성에 대한 부정의 부정이다. 새로운 '일'은 차별성을 말살하는 은주시대의 추상적 동일성이 아니라 차별성의 구체적 동일성을 내포한다.전국시대 중기 [노자]의 '일이'설의 출현: '일'을 숭상하는 새로운 학설과 '이'를 숭상하는 학설이 서로 영향을 주고 결합한것이다. 노자는 '일'을 통해서 통일체를, '이'를 통해서는

통일체 내부에서 대립하는 두 측면을 표현하였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노자] 모순관의 중요한 특징이 대립면의 동일성에 대한 중시임을 알수 있다.

 

 

[노자]이후에 순자의 '일양'설과 한비자의 '불양'설이 나타난다. 인간의 인식능력은 '양'으로도 표현되고 '일'로도 표현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혹은 여러 가지 사룰을 동시에 인식하는 능력을 '양'이라고 하고, 어떤 한 사물만을 전일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일'이라고 한다. 이는 변증법적 통일인것이다. 한비자는 중국철학사에서 '투.쟁'을 강조함으로써 유명해진 철학가이다. 그의 모순관의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는 '불양'설이다. 그는 자연계이든 인류사뢰이든 사상의 영역이든 모두 "세가 양립할 수 없는 "

 

 

 

[한비자;인주]모순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인식하였다. 이 학설의 철학적 의미는 모순하는 사물은 병존할 수 없으며 대립면 사이에는 조화될 수 없는 격렬한 투쟁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모순의 투쟁성을 강조하였으며, 반면 모순의 동일성을 간과한 한계가 있다. '일'은 항상 모순의 동일성을 나타내며, '양'은 항상 모순의 투쟁성을 나타낸다. 춘추전국시대 일양범주의 운동과정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면 우리들은 변증법적 사유의 발전이 희미하게나마 하나의 순서-모순,대립면의 동일성에 대한 인식으로보터 모순,대립면의 투쟁성에 대한 인식으로의 -를 보여 주고 있음을 알게 될것이다.

 

 

 

 

5.춘추시대의 중국에는 네 가지 문화영역이 있으며, 그것들은 네 가지 문화유형을 생산해 냈다. 연제문화, 형초문화, 추로문화, 삼진문화가 그것이다. 오행은 동방의 은문화에서 연원하며, 후에는 주나라에 의해 계승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주로 연제지방에서 유행하였다.음양은 남방의 초문화에서 연원하지만 매우 일찍이 주원지방에 유입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초나라의 사상가 범려, 노자, 장자, 굴원등이 음양학설의 형성과 발전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중화와 일양은 주대의 팔괘문화에서 발단이 되었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정복한 이후 서쪽에서 이주해와 중원을 장악하였으며, 그에 따라 중화는 추로지방에서, 일양은 삼진지방에서 유행하였다. 오행, 음양, 중화, 일양 등 여러 범주는 매우 일찍부터 서로 영향을 주고 서로를 흡수하였다. 전국시대 중기와 후기에는 교통의 발단,인적 교류의 확대, 각 학파의 논쟁등으로 인해 문화의 대융합현상이 대두되었으며, 그에 따라 오행, 음양, 중화, 일양 등 여러 범주의 대융합이 진행되었다.노자: 초나라 사람이였다. 그는 매우 자연스럽게 음양 범주와 일양범주을 자신의 이론체계속에서 결합시켰다.

 

 

추연: 노자가 시도한 음양 범주와 오행 범주의 결합을 완성한 인물. 그 일파는 호세에서 음양오행학파라고 불리워진다. 사맹학파: 중화를 중심으로 하여 오행을 결합시키고 음양을 배척하였다. 그들은 '중화학설'을 제창함과 동시에 "옛날 일들을 살펴서 새로운 학설을 만들고 그것을 오행이라고 하였다.[순자;비십이자편]" 순자학파: 중화를 골간으로 하여 음양을 흡수하고 오행을 비판하였다. 순자는 정치적으로 유가의 학설에 법가의 학설을 가미하였으며, 철학적 저작에서는 항상 일양 범주를 운용하였다. 순자의 이론 체계에서 두리는 중화, 음양, 일양범주의 융합을 발견하게 된다.

 

 

 

 [역전]: 춘추전국문화의 융합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추로문화와 형초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동시에 삼진문화와 연제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이때문에 그것의 이론체계에는 오행, 음양, 중화, 일양의 제 범주가 포함되어있다.[역전]의 철학세계에서는 ① 음양이 최고 범주로 격상된다. ② 중화범주는 [역전]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③일양의 범주역시 중요한 지위를 점한다. ④ 오행사상을 자신의 팔괘체계 속에 편입시키려고 시도한다.음양사이에는 '상착'과 '상박'의 관계가 존재한다. '상착'은 상호교착하는 관계이며, '상박'은 상호대립,투쟁하는 관계이다. '중'을 숭상하는 관념은 [역전]에서 괘의 위치를 통해서 명확하게 서술된다.더욱 명확한 중화사상은 강건중정과 보합대화를 강조하는 데서 드러난다.[계사상]에서는 우주의 생성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역에는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낳는다. 양의는 사상을 낳으며, 사상은 팔괘를 낳는다"고 하였다.

 

 

[설괘]에 "상제는 만물을 진괘(진괘는 동쪽이다)에서 태어나게 하고 손괘(손은 목이다,동남쪽이다)에서 함께 자라나게 하며, 이괘(이는 불이다,남쪽의 괘이다)에서 성장하게 하며 곤괘(곤은 땅이다)에서 자양을 얻도록 하고 태괘(태는 가을이다)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고 건괘(건은 금이다)에서 음양이 서로 다투게 하고 감괘(감은 수이다,정북방의 괘이다)에서 휴식하게 하고 간괘(간은 동북의 괘이다)에서 완성케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동,서,남,북,중앙의 오방과 목,화,토,금,수의 오행을 팔괘에 분배한 최초의 구상이다.춘추전국시대 변증법적 모순관의 형성의 논리적 과정의 개괄

 

 

   보편적 연관                 대립면의 동일성
                ↘                  ↙
                  내재적 모순
                 ↗              ↖
   운동,변화                  대립면의 투쟁성

 

 

 

 

6. [역전의 논리구조]

'역'은 [역전]의 가장 기본적인 범주중의 하나이다. 주희의 설명에 의하면 변역의 뜻과 교역의 뜻이 있다.'도'역시 [역전]의 기본 범주중의 하나이다. 도는 역의 결론으로 보편적이고 운동,변화와 보편적 연관에 관한 법칙임을 의미한다. 또한 도는 음양으로 귀결된ㄷ. 천지의 모든 사물은 음양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음양의 상이한 속성에 근거하여 강유하고 하는 두 가지 모순, 대립하는 힘으로 구분될 수 있다. 따라서 강유는 곧 음양이며, 운동,변화의 내재적 요소이다.

 

 

[역전]에서 음양 대립면의 투쟁성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개념은 '상박' 상공' 상마' '상탕'등이다. 이러한 것은 '역 ->도 ->음양' 이라는 범주 체계로 표시될 수 있다.[역경]은 점치는 책이며, 종겨적 신비주의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만물의 보편적 연관과 운동,변화의 사상이 내포 되어있다.이러한 소박한 변증법 사상은 주로 괘상의 교착, 변의 그리고 몇몇의 괘,효사를 통해서 표현된다.전국시대의 [노자]에는 선진시대 변증법사의 첫 번째 이른 체계가 포함되어 있다.

 

 

[노자]에서는 많은 곳에서 사물과 사물 사이의 모순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것이 더욱 중시한 것은 사물 자체의 모순,곧 내재적 모순이다. 그는 모순체 내부에 존재하는 대립면 사이의 동일성 관계를 비교적 중시하였으나 그들 사이의 투쟁성 관계는 간과하였다. [노자]에 들어 있는 소박한 변증법 사상의 주요한 내용은 사물이 반대면으로 전화한다는 법칙이다. 또한 전화관도 문제를 가지는데 반데면으로의 전화가 무조건적이며, 따라서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결국 선진새대 변증법사가 [역전]의 논리구조, 범주체계의 탄생의 기초이며, [역전]의 논리구조 범주체계는 선진시대 변증법사의 축소판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7.서주시대 말기 오행 범주는 오행상잡설의 단계를 거치고 있었고, 음양 범주는 육기균형설의 단게를 , 중화 버즈는 타화설의 단계를 , 일양 범주는 불일관념의 단계를 거치고 있었다. 그것들의 논리적 규정이 갖는 공통성은 변증법적 사유에 입각하여 차별성과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변증법적 모순관 형성에서 '차별' 단계의 지표가 된다. 이 단계의 대표적 인물은 분명히 사백이다.춘추시대 말기 오행 범즈는 오행상승설의 단계를, 증화 범주는 부화설의 단계를 , 일양 범즈는 '이'혹은 '양'을 숭상하는 학서르이 단계를 거치고 있었다. 그들의 놀리적 규정이 갖는 공통성은 변증법적 사유에 입각하여 본질적 차별성과 대립성에 대한 이해를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이 단계의 대표적 인물은 사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전국시대 중기와 후기 오행 범즈는 오행상생설, 오행상생상승설등의 단계를 거치고 있었고, 으,ㅁ양 범주는 음양상화설, 음양상착상박설드의 단계를, 중화 범주는 중화설, 대화설등의 단계를, 일양 범주는 '일'을 숭상하는 학설, 일양설등의 단계를 거치고 있었다. 그것들의 논리적 규정이 갖는 공통성은 변증법적 사유에 입각하여 대립면의 통일과 모순에 대한 이해를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이는 변증법적 모순관 형성에서 '모순'단계에 속한다.[역전]은 이 단계를 대표한다.

 

 

 

음양오행학설사 사송령(謝松齡)

서론: 의식,표상,언어 그리고 문화문화의 창조는 정신활동의 결과이니 대체로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잇다. 거시적인 문화 창조는 군체로서 인류의 모든 창조이며, 미시적인 문화창조는 개인의 정신적 물질적 활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거시적이든 미시적인 것이든 간에 창조과정은 모두 의식의 표상으로서, 표상이 언어로 드러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본체이며, 표상과 언어는 그것의 적용이다. 인루가 무형의 의식을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서 생산한 유형의 표상과 언어가 곧 우리들이 말하는 광의의 문화이니 유형의 문화는 무형한 체험의 표상인 것이다.우리들이 보고 듣는 것은 문화이고, 표상이며, 언어이다. 그 가운에 비록 의식이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문화나 표상, 언어는 의식을 남김없이 보여 주지는 못하며 깊은 의식일수록 그것을 다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 만일 표상을 잊어버리고 의식으로 완전히 몰입할 수 있다면 '광활하고 정결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제 1장 두 문화의 원류

1. 천의 탄생

1) 두가지 장애'천'의 원류를 고찰하고 '천'의 광의를 탐구할 때 우리는 종종 여러가지 장애를 만나게 되니,

 

 

첫째는 '역사적'장애이다. 중국 문화의 연원이 깊다고는 하나 문자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기원전 1400년 전후까지 소급 될 수 있을 뿐이며, 발굴된 유산들도 상당히 단편적이어서 그것만으로는 '천'의 원류를 알아볼 수 없다. 또한 현존하는 엄청난 양의 문헌에 관심을 가지더라도 쉽게 착오를 범할 수 있으니 고대 중국의 역사는 사실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상과 환상으로 가득 차 잇었으니 위서의 작가들은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역사를 묘사함으로써 역사적 이상과 환상을 편집하였지만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으니 이러한 점들이 이성적인 고찰에 많은 장애를 준다. '천'을 탐구하는 데 잇어서 두번째 장애는 '심리적'장애이다. 인류는 모두 사물의 외면형식에 집착하고,언어에 속박되며,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완고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서양문화에 길들여저 있는 현대의 학자들은 '천'을 지상신과 유사한 것으로 해석하니 서양에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지상신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또 분석적 사고방식에 의해 하나의 전채로서의 천은 주재로서의 '천',물질로서의 '천', 자연으로서의 '천', 의리로서의'천', 운명으로서의 '천'등으로 분해된다.이러한 역사적 장애와 심리적 장애는 서로 맞물려 있으니 역사적 장애의 일정 부분은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심리적 장애의 유산이며,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장애는 후대에 새로운 역사적 장애를 만들어 놓을 것이다.

 

 

 

2) '제'와 '천'중국 문화에서 최초의 문자는 은대의 갑골복사에 남아있으니 이로부터 은문화의 핵심이 '帝'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은나라 사람이 여러 '방'을 정복함에 따라 '제'는 지상신으로 확대 되었으나 나중에 이르러 '제'는 한 부족 수장의 상징으로 전락하였다.그러나 주나라 문화의 핵심은 '천'이었으니, '천'의 이름으로 '제'를 정벌하였다는 사실은 은나라와 주나라의 충돌을 보여주니, 이는 실상 문화의 충동이었다. 번역은 두 개의 문화가 접촉할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별과로, 번역의 과정을 통해 '제'는 '천'의 합의를 부여받고 '천'의 이명동의어가 되었으며, 번래의미는 상실하였으니,'천'이 '제'에 비해 포용력과 동화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3)'덕'과 '민'--천명의 표징'천'의 의지와 역사의 운명은 사람들의 덕행과 민심의 향배에 의해서 수시로 바뀔수 있었으니, 덕이 있는자는 천명을 받고 덕이 없는 자는 '천'이 멸망케 한다는 의식에 입각해서 하나라와 은나라는 모두 '덕'과 '민'을 표징으로 하는 주공의 천명역사론 속으로 편입 되었다.

 

 

 

4)경천사상과 조상숭배주나라 사람들은 '제'에 '천'의 합의를 부여하였지만 '제'의 기존의 합의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으니 이때문에 주문화 속에는 '제'가 표상하였던 원래의 문화적 요소인 조상숭배의 관념이 수행되었다. 주문화 전통의 계승자들은 경천, 곧 상제를 숭상하는 '제사지례'와 조상을 숭배하는 '종묘지례'를 거의 동등한 비중의 제사의식으로 간주하였다. 실상 근본적인 의의에서 볼때 '종묘지례'는 조상숭배를 통해 "선조들을 공경하고 밝은 덕을 계승함으로써" 상제와 짝할 수 있었던 선왕들의 덕을 연장시키려는 가족적인 도덕계승의 행위였으며, '효'의 실질적인 내용이었다. 반면에 '교사지례'는 직접적인 '천명'에의 감응을 통해서 자신의 덕을 끊임없이 고양시키려는 개인적인 도덕행위였으니 조상숭배와 경천은 완전히 일치되는 것이었다.

 

 

 

2. 음양호행의 연원

1) 고대 문헌이 보이는 단서들

(1)오행관념[국어],[춘추좌씨전] 등에서는 춘추시대에 이미 오행관념이 유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야나 사료의 신빙성이 의심스럽다. 그러나 전국시대 중,후기에 형성된 오행종시설이나 홍범, [여씨춘추]의 십이기등에 나타나는 이미 상당히 성숙되고 완비된사상체계이므로 오행관념의 발생이 전국시대 중,후기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알수있다.

 

 

 

(2)음양관념[시경],[상서],[의례],[주역]등에서 음양을 살펴보면 이는 자연계속의 하찮고 미세한 현상에 불과하며, 어떤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국어]와 [춘추좌씨전]등에 와서야 음양관념으로 자연의 현상을 해석하였으나 이 또한 진위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2) 두 문화의 계시유가의 경전에서 음양오행사상의 연원을 찾기란 쉽지 않으니 이는 음양 오행사상과 춘추시대 이전에 쓰여졌다고 고증되는 경전이 되는 경전들이 서로 상이한 체험세계와 문화정신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가의 경전들은 단지 한 특정한 문화의 '경전'일 뿐이며, 음양오행사상은 또 다른 문화의 정신형태이다.덕을 숭상하고 실질에 힘쓰는 그리고 인사를 중시하는 주나라의 문화는 내륙의 중심부에서 발생하였으니 내륙문화와 비교해 볼때 해안 문화는 매우 다채롭다. 내륙인들에게 바다는 신기한 것이고 바다 밖은 다른 세계였으니 해안문화의 신비한 색채와 초절적인 상상력 그리고 우주와 자신의 생명력에 대한 체렴은 내륙의 사상가들의 눈에는 '괴이한 일' 힘쓰는것과 관계되는일, 어지로운 일, 신묘한 일로 비쳐졌을 것이다.음양오행사상은 비주문화권에서 연원할 수 밖에 없었으니 결국 새로은 문화적 배경에서 , 또 그러한 문화적 배경을 통해서만 그 자신의 생장에 적합한 비옥한 토양을 발견 할 수 있었던 것이다.3. 음양오향의 기원에 관한 미스터리

 

 

 

1) 음양관념의 기원음양관념의 기원은 몇 가지로 분류될 수 있으니 첫째는 [주역]기원설이다. 이는 음양관념이 [주역]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하는 견해로 [장자] 천하에서 "[역]은 음양을 말한 것이다."라는 말에 서 비롯하였다. 둘째는 성기 기원설로 음양관념이 생식기 숭배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하는 견해이다. 셋째는 자연취상설로 음양관념이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하였으니 이상 세가지 학설은 모두 광범위하게 유행하였으나 실상 그것들은 모두 전통적인 학설을 '발전'시킨 것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외에 몇 가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있으니 첫째 '심우러태양력'기원설로 이는 자연취상설을 부연한 것이다. 둘째 '매복'기원설로 매복의 점법에서 '하나는 아래로 향하고 하나는 위로 향하는 것'을 '성효'라고 하며, 여기에 '음양'의 관념이 내표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2) 오행관념의 기원오행관념의 기원은 음양관념에 비해 더욱 복잡하니 그 기원에 대한 해석도 더욱 '신비적인'색채를 띤다. 첫째는 '천'기원설로 이는 홍범에 근거하여 오행이 '천'에 의해 주어졌다는 견해이다. 둘째 '오방' 기원설로 여ㅣ에서는 오행관념이 '오방'에 대한 은민족의 숭배에서 기원하였다고 생각한다. 셋째는 '오재'기원설로 [춘추좌씨전]이나 [국어]등의 자료헤 근거하여 오행관념이 생활에 불가결한 다섯 가지의 재료,즉 '오재'에서 기원한다고 보았다.

 

 

 

제 2장 관념체계의 융합

1. 충돌과 융합

1)예악의 붕괴와 제작백가의 등장평왕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주문화는 점차 쇠퇴하고 전통역시 신속하게 동요되었으니 여러가지 비주문화의 요소는 신속하게 생장하여 끊임없이 주문화의 표면을 침식하였으며, 그에 따라 춘추시대에 일어났던 '예악의 붕괴'와 '천하무도'의 과정을 가속화시켰다. 이렇나 문화적 격변은 직접적으로 '관학'의 쇠퇴와 '사학'의 융기를 낳았다. 이러한 사학의 흥기와제자백가의 출현은 내륙문화의 쇠퇴에 따른 결과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완전한 해체를 촉진시키는 원인이기도 하였다.

 

 

 

2) 세가지의 융합방식 상이한 관념첵{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표면적인 문화형태는 붕괴될 수 있다는 심층적인 고나념체계를 쉽게 소멸되지ㅐ 않으니 하나의 관념체계가 충돌의 과정에서 다른 관념체계를 개조하고 동화시키는 방향과 정도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각기 특색있는 새로운 사상체계가 나타난다.

 

 

⑴ 새로운 관념이 기존의 관념체계를 개조하는 경우 이는 선진유가가 채택한 방법으로서 대체적으로 자사와 맹자의 일화는 음양가의 사상을 이ㅇ하여, 그리고 순자일파는 황노사상을 이용하여 내륙문화의 고나념체계를 개조시켰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인생관의 방면에서만큼은 새로운 관념체계의 영향을 적게 받았다.

 

 

⑵ 새로운 관념체계가 기존의 관념을 동화시키는 경우추연의 학설은 실상 해안문화의 관념체계가 내륙문화의 어던 기본관념을 융화시킴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대륙문화의 많은 관념들은 실제 정치에서 종종실용적인 의의가 있었으나 추연의 사상체계 같은 것은 실제정치를 위해서 창안된 것이 아니니 그들은 단지 자신의 세계를 묘사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추연의 오덕종시설과 홍범의 오행설 그리고 [역전]의 음양설은 모두 음양오행학설이 내륙문화의 관념을 동화함으로써 구성된 사상체계였다.

 

 

⑶ 새로운 관념이 서로 접촉,융합하는 경우서주시대 이래 내륙문화가 경화,붕괴될때 해안-변방문화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은 그 틈을 타서 나타나게 되었고 서로 접촉,융합하게 시작하였으니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황'과 '노'의 융합이였다. 황제와 노자가 융합되어 나타난 황노학의 체계에는 실ㅈ거인 정치술도 있지만 '장생의 도'에 대한 이론도 있었으니, 이 경세와 양생의 기본원칙은 간이,어쟁,무위를 요점으로 한다.

 

 

 

2.오덕 종시설추연은 보통 음양가 혹은 음양오행가로 지목되나 추연이 연관된 문헌에서 볼 때 오덕종시설에는 음양관념이 없다. 그러므로 추연이 음양과 오행에 대해 언급하였다 하더라도 양자를 하나로 융합시켰다고는 볼 수 없다. 추연의 사상체계중 당시 각국의 제후들에게 가장 줏시되었던 것은 역사 철학, 특히 오덕종시설이었다.오덕종시설은 역사의 발전이 변화하는 것이며, 또 법칙적인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왕조의 흥망과 제왕의 교체는 단지 오기운행의 역사적 표상일 뿐으로 인간의 주관적 노력은 기운행을 체활하며어 어떤기가 왕성해지고 있는지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행위, 곧 덕을 왕성해지고 있는 기의 특성과 부합시켜 평안하게 천하를 다스리는 것에 한정된다. 만약 그러한 법칙을 인식하여 상황에 맞게 자신의 행위를 조절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천하를 재패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혼란이 찾아온다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왕성한 덕에 의거하여 천하를 재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될 수 있는가의 여부는 그가 '천'이 백성에게 먼저 보여주는 '부응'을 얻었는가에 달려있다 하였다.

 

 

 

3. 홍범오행설홍범은 오행학설사에서 시대를 가르는 획기적인 저작이나 역시 음양과념은 발견되지 않으니 당시에는 음양오행관념이 아직 웅합되지 못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홍범의 획기적 의의는 처음으로 '오행에의 순응'을 핵심으로 하는 경세의 대법칙을 체계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든 세계는 오행체계속에 편입시켰다는데 있다. 홍범은 제자 백가가 흥기하던 전국시대에 탄생하였으니 그것은 두개의 관념체계가 융합한 산물이었다.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비록 해안문화의 오행세계이지만 그 안에는 또한 내륙문화의 색체가 엿보인다.4.[역전]의 음양설오덕종시설과 홍범오행설에는 음양관념이 나타나지 않으니 비교적 체계적인 전국-진한 시대의 음양사상은 [ㄷ전]에 보인다.

 

 

[주역]은 오랫동안 '음양응ㄹ 말하는' 책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러한 인식은 전국시대에 시작되었으니 원래 [주역]에는 음양관념이 없었다.[역전]은 [주역]을 해석한 문헌으로 표면적으로 볼때 십익은 음양관념으로 [주역]을 해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역전]은 [주역]을 음양체계속에 편입시켰으며, [주역]은 오히려 음양사상의 주해서, 음양을 설명하는 책이 되었다. [주역]의 음양화는 이렇게 해서 실현되었으니 [주역]은 음양사상의 상징체계가 되었다. 그리고 64괘는 마침내 우주와 인생의 모든 음양변화를 포함하게 되었다.

 

 

 

 

 

제 3장 두개의 전통, 하나의 정신

1. 다른 길, 같은 귀착지해안-변방문화는 춘추-진한 시대에 이루어진 내륙문화의 충돌,융합의 오랜 과정을 통해서 점차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구체적으로 내륙문화의 관념체계를 동화,융합하였다. 이는 진한 시대에 이르러 음양,오행학설이 모든 것을 통섭하는 서술체계로 나타나기 시작 하였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서쪽의 진나라에서 만들어진 [여씨춘추]는 당시 점차 전파되어 가고 있었던 오행사상과 음양사상을 좀 더구체화 시켰으니 그것에는 역사관을 보여주는 오덕종시설의 개요가 기록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십이세기에는 한해동안 일어나는 오기의 운행에 대응하는 천상,기상,물상이 묘사되어 있었으며, 또 그것에 근거하여 일년 열 두달동안 정령을 통해 시행되어야 하는 우주의 율령이 제정되어 있었다.또한 내륙문화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았던 황노사상이 한초에 지배사상, 관방철학이 되었으니 지배집단은 그것에 의거하여 '아무것도 작위하지 않으면서 다스린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결국 유가와 도가의 두개의 전통은 비록 분야를 달리하고는 있지만 동일한 체험세계에서 생활하였고 동일한 서술체계를 사용하였다. 그러면서도 양자는 각각 개별적으로 고대 중국 문화의 상이한 영역을 점거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는 상보적으로 유가 속에 도가가 있고, 도가 속에 유가가 있다고 할수 있다.

 

 

 

2. 음양오행과 한유의 혁명

1)동중서의 천인학설 동중서는 전한시대 유학 혁명의 중요한 인물로 진한시대의 유가는 새로운 관념체계와 서술체계인 음양오행사상의 지배를 받은 유가였으니 동중서가 '유자의 종주'가 되고 '모든 유자들의 으뜸'이 된 것은 그가 처음으로 음양을 추론하였기 때문이었다.동중서가 천인광계의 차원에서 하나의 체계를 구축하였으니 이는 유가체계의 기본적인 관념과 도덕적인 이상ㅇ르 이미 존재하는 체험세계에 편입시켰을 뿐이니 그러한 체험세계는 음양오행을 통해 서술된 것이다. 그래서 '유학의 음양오행화'는 필연적인 추세였으니 그 원인은 두가지였다. 첫째로 당시 사람들은 음양오행의 세계속에 살고 있었고 무의식적으로 음양의 소식과 오기의 운행을 통해서 모든것을 표현하였다. 둘째 유학은 음양오행화되지 않고서는 결코 부흥할 수 없었으며, '독존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도 없었다.

 

 

 

2)오경-음양 호행의 각주진한시개의 유자들은 음양오행설을 통해서 유가의 경전을 해석하였다. 그것을 표현적으로 볼때 유가경전을 '음양오행화'하는 것이였으나 실제적으로는 이미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관념체계가 유가의 학설을 동화시킨 것이었다. 이것이 진한시대에 이루어진 '유학 혁명'의 실상을 보여준다.

 

 

 

3)위서의 기원위서는 해안화 과정이 극성에 달하였던 시대의 산물이며, 신비주의적 색채가 더욱 농후한 체험세계를 보여 준다. '위'는 '경'에 대한 말이다. 따라서 칠위는 오경에 대한 말이가. 후한 초기에는 칠위를 내학, 오경을 외학이라고 하였으며, 위서가 경서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위서의 내용은 경설, 천문, 지리, 역법, 음룰, 역사, 문자, 전장제도 등 거의 취급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하나의 백과전서라고 할 만하다. 그 내용은 대단히 방대하고 복잡하지만 그 핵심은 음양오행설을 통해서 천인의 도를 서술하는 데 있다.위서는 금문경에 비해 보다 완전하게 체험세계를 표상한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는 "위라는 것은 경의 지류로서 경에서 확실하게 언급되지 않은 뜻을 부연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의 '경'은 음양오행화된 금문경을 가리킨다. 위서는 우주질서와 체험세계에서의 유학의 지위를 더욱 제고하였다. 위서는 유학음양오행화의 극치를 보여 준다.공자가 덕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는 흑제의 아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수덕으로 왕이 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목덕과 화덕이 교체되는 시대에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그 지위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덕만 있으면 왕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주나라의 천명관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4) 상생에 입각한 오덕종시설과 유흠유흠은 고문경학의 창시자이다. 한대 금고문학에 관한 문제는 청대이래 많은 학자들의 고증을 통해 이미 개괄적인 모습이 드러나 있고, 그것은 몇 가지 점으로 요약된다. 첫째, 거문경은 금문경보다 늦게 나타났으며, 대부분은 애제 연간 유훔이 비부교서로 재직할 떼 '발견' 되었다. 둘째. 고문경을 전한 계통은 불분명하다. 세째, 금문경학의 핵심인 [춘추공양전]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춘추좌씨전]은 유흠이 좌구명의 [국어]를 헤체하여 필요한 부분을 [춘추]의 각 기사 아래에 첨가함으로써 완성 되었다.고문운동의 창시자인 유흠은 [홍범]오행설을 통해서 각종 재이를 체계화하고 범주화한 경학가였다.

 

 

[한서] [초원왕전]에서는 "유씨의 [홍범론]은 [상서대전]의 뜻을 밝혀 하늘과 인간의 감응을 드러내었다"고 하였다.그렇지만 유흠의 가장 큰 업적은 오행상생에 입각한 오덕종시설을 창안하였다는 것이다. 그 작업은 고문운동이라는 거창한 기치아래에서가 아니라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오행상생에 입각한 유흠의 오덕종시설은 그의 주요한 저적 중의 하나인 [삼통력]에서 인용되는 [세경]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다.

 

 

 

[세경]의 역사적 계통은 태호제 포희씨부터 시작된다. 그 순서를 보면, 태호제는 "하늘을 이어서 왕이 되었으니 모든 왕의 으뜸이 된다. 덕은 목에서 시작된다." -> 공공씨는 "비록 수덕을 가지고 있었지만 목덕과 화덕사이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의 순서가 아니었다." -> 염제는 "화덕으로 목덕을 이었다." -> 황제는 "화는

토를 낳기 때문에 토덕이 된다." -> 소호제는 금덕이다. -> 전욱제는 수덕이다. -> 제곡은 목덕이다.-> 당제는 화덕이다. -> 우제는 토덕이다. -> 백우는 금덕이다. -> 성탕은 수덕이다. -> 무왕은 목덕이다. -> 진백의 경우 "진나라는 수덕이었지만 주나라의 목덕과 한나라의 화덕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역시 "백작의 벼슬은 하였으나 왕은 아니었다." -> 한 고조는 화덕이다.오행상생에 입각한 오덕종시설은 당대와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후한 광무제 유수는 한나라가 화덕이라는 설을 이용하여 [적복부]를 천명의 부응으로 선전하고 천자가 되었다. 이후 중국에서 있었던 동일 민족간의 왕조 교체에서는 모두 이 전통에 따라 선야의 전례를 행하였다.

 

 

 

 

5) 혁명, 변질, 응보후세에서 고문을 높이고 금문을 폄하하게 된 것은 혁명을 억제하려는 관의 조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책은 많이 섭렵하지만 응용할 줄 모르는 학자'들은 이러한 풍조 속에서 양산되었다. 그러나 한유들은 그렇지 않았고 그들은 음양오행을 통해 서술된 우주의 도덕율령으로 인류사회를 감시하였다. 그것은 때때로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들은 특히 왕의 실정과 국가의 타락에 맞서서 활약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투옥되는 것을 면할 수 없었다. 전,후한 교체기에는 한유의 체계가 극도로 발전하고 도참도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실상 고문 학자는 금문학자는 모두 도참을 신봉하였고, 심지어 참어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왕망의 찬위는 도참의 힘을 빌린 것이었다. '천명을 받으려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필요한 참어를 찾아낼 수 있었으며, 참어는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고 혁명을 위해서도 사용되었다.추한, 위진 교체기에 사회의 체계는 사분오열의 말기적 징후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한유들의 사상체계가 생명력을 잃은 표현이었다. 생동하는 우주의 도덕율령은 '예법'이나 '명교'로 경직화되었다. 변질로 인하여 한대의 유학은 독존적인 '관방철학'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불교의 전파와 도교의 흥기에 따라 유가는 더욱 더 그들의 천하를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3. 음양오행, 황노술, 신선도교전한새대 이래 유가와 도가는 상이한 전통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동일한 관념체계로부터 나왔으며, 또 동일한 서술체계를 사용하였다. 그들에게는 '인'과 '지'라는 개별적인 분야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동일한 체험세계속에서 별립하는 상호 보완적인 영역이었다. 이 두 개의 영역 사이에는 눈에 띄는 커다란 간극이 없다. 그것은 상호보족적이며, 교통하고 융합한다.

 

 

 

1) [회남자]의 황노술전한 초기는 황노술이 성행하고, 국가의 통치사상으로 자리잡았던 시대였다. 그렇게 된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는 유가가 도가사상과 대항할 만한 학설체계를 아직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었다.그에 비해 [회남자]의 무위사상은 군주 한 사람의 자존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권세는 군주의 수레이다. ...... 그것을 다룰 줄 알면 남을 제압하고, 다룰 줄 모르면 남들에게 제압 당한다.[회남자]" 황노사상의 통치술은 거의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황노도 한 무제는 제자백가를 내쫓고 유술만을 숭상하였다. 동중서 등이 구축한 천인관계, 음양재이의 변화에 관한 유학은 황노술을 대신하여 관방철학이 되었다. 한대에서 황노술은 시종일관 관방철학인 유학에 대항하는 힘이었다. 오행상생에 입각한 오덕종시설에 따르면 한나라는 화덕이고, 한나라를 대신하는 왕조는 토덕이다. 토덕은 황색을 숭상한다. "황가가 일어날 것이다"라는 말이 혁명을 선양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3) 부록도파와 [태평청령서]황노술의 주요한 구성요소중의 하나는 신선방술이다. 그것은 기복과 소재, 벽사와 벽귀신, 죽음과 관련된 부적과 주술등의 신술과 섭생술, 연단술, 양생술 등의 선술로 나누어 진다. 부록도파는 하층 사회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상술한 장각의 태평도와 장릉의 오두미도도 부록도파에 속한다. 부록도술의 특징은 부적이나 주문, 신수등으로 재화를 물리치고 병을 치료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질병은 음양이 균형을 잃고 오행이 서로 다투기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병을 치료하는 방법도 음양을 조절하고 오행에 순응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부적 태운 물이나 주문으로 하는 치료술은 간단한 것이지만 이렇게 천지의 도를 표현한다. 그 도는 또한 치국의 도이기도 하다.

 

 

 

4) 단정도파와 [주역참동계] 초기 부록도파는 하층 사회에서 유행하였고, 그 도술은 부적 태운 물이나 주문 같은 간단한 종류였다. 그에 비해 단정도파의 도술,즉 섭생, 연단, 수련은 부록도파의 도술과 비교해 볼때 많은 시간과 돈을 요구하며, 내면의 심층적인 수련을 중시한다. 따라서 그것은 일반 하층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대역과 황노학, 단약제조술 세 가지의 도는 결국 합일 되는 것이며, 그래서 '참동걔'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참동계] 전편을 살펴보면 실상 음양소식과 오행상생, 상극을 통해서 연단술의 요지와 순서를 서술하고 있다. 그 중 음양오행학설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래의 두 학설이다.감리는 천지의 너른 성곽이다. 경방의 [역전]에서는 "건곤은 음양의 근본이며, 감리는 음양의 성정이다"라고 하였다. '감리는 천지의 너른 성곽이다'라는 명제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위와 같다. 그림중의 흰 부분은 양이고, 검은 부분은 음이다. 왼쪽 반은이를 상징하고 오른쪽 반은 감을 상징한다. 음양이 서로의 근거가 되고 감리가 교합하는 것이 '구조'이고 '과정'이다.

 

 

이 도해은 후에 [태극도]의 주요한 구성요소가 된다.삼오는 조화의 지극한 정수이다.이 명제에 대해서는 두가지의 이해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여기에서의 '삼'을 수,화가 합하는 수로, '오'를 토의 수로 보는 견해이다. 두 번째에는 '삼오'를 '세 가지의 오'로 보는 견해이다.

 

 

[홍범]에서는 "첫 번째는 수이고, 두 번짼는 화이고, 세 번째는 목이고, 네 번째는 금이고, 다섯 번째는 토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명제는 오행의 수를 서술하는 명제이지만 그 가운데네는 감리가 변역의 근본이 되고 천지가 교합하는 음양의 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과정'이며, 또한 '구조'이다. '감리는 천하의 너른 성곽이다'라는 명제와 '삼오는 조화의 지극한 정수이다'라는 명제는 단의 구조, 단의 형성과정임과 동시에 우주의 구조, 우주의 발생과정이기도 하다. 서양인들은 세계를 주객이 대립하는 세계로 파악한다. 과학의 영역에서 인체, 심지어 두뇌와 심리활동은 모두 객체이다. 이렇게 행위를 지배하는 관념체계의 상이함을 통해 유사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커다란 격차가 있는 상이한 반응 방식이 나타나는 것이다. 신선도술은 '빼앗고' '훔치는'것을 요구하지만 그것이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여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천지가 교합할 때"만이 "음양 조화의 기틀은 빼앗을" 수 있다.

 

 

 

 

5) '내도외유' 논변갈홍의 사상체계는 줄곧 "안으로는 신선도, 밖으로는 유술"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갈홍이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은 황노학의 정신적 전통이었다. 갈홍의 "밖으로는 유술"이라는 것은 실상 황노사상의 통치술이며, 그것은 [포박자]외편을 통해서 엿보인다. 그 '유술'이라는 것은 신불해와 한비자의 법치사상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갈홍은 또 '인'은 폄하하고 형벌을 숭상한다. "인이라는 것은 정치를 치장하는 데 쓰이는 기름과 분이고, 형벌은 세상을 다스리는 고삐와 채찍이다." 그렇지만 갈홍은 오히려 자신의 학문을 "유가의 학설에서 벗어나서 황노의 사상에 합치되는 것"이라고 자평하였던 왕충을 극도로 칭찬하면서 '으뜸가는 큰 재목'으로 평가한다.후세의 도교는 이렇게 양생을 통하여 신선이 되는 일과 시대에 돕고 나라는 다스리는 일을 병행하였다.

 

 

 

4. 리기 : 태극과 음양오행도,천에대한 문제에 대해 명확한 해답이 없다가 전한시대가 되어서야 이러한 문제에 대한 초보적인 답변이 나타난다. 먼저 동중서는 음,양,목,화,토,금,수를 천의 열 가지 표현태속에 집어넣었다. 그로써 음양오행은 천의 열 가지 표현태 중 일곱가지가 되었으며, 모든 사물의 시조인 천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므로 음양오행은 천 자체가 아니라 천의와 천도의 표현일 뿐이다.

 

 

음양오행의 창조자들은 그들의 체험을 서술하는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 냈지만 그 서술체계의 극단적인 발전은 오히려 체험세계를 왜곡시켰다. 그에 뒤따라 나타난 것은 참위와 표리가 되는 한대 유학의 몰락이었다. 유학은 '장구'와 '훈고'의 수렁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렇지만 한대 유학과 동일한 관념체계에서 나왔고, 동일한 서술체계를 사용하였던 도교는 신속히 세를 확장해 나갔으며, 생기찬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유가는 '도가를 빌려서 유가로 들어간다.'는 정신으로 송명이학을 탄생시켰다. 이학의 탄생은 더 높은 차원에서 그러한 정신을 표현하였다. 이학은 먼저 '천' '도'와 음양오행의 관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태극도(설)[태극도(설)]은 이학의 가장 중요한 경전 문헌 가운데 하나이다. [태극도설]을 살펴보면 그 속의 천인정신을 체찰할 수 있다. 그중 최고 범주는 무극-태극이며, 기본 범주는 음양, 오행, 천,지,인이다. 후자는 동중서가 말한 천의 '열 가지 표현태'와 비슷하다. [태극도설]은 음양과 오행이 모두 태극에서 나왔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재극은 무극에서 근본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무극이 [계사전]에서 말하는 '역', [노자]에서 말하는 '도' 혹은 '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태극은 [계사전]의 태극이고, [노자]의 '일' 혹은 '유'이다. [태극도설]의 무극, 태극, 양, 음, 오행, 만물은 생성의 시간적인 배열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선후의 구분도 없다. 사시의 운행과 만물의 변화만이 끝이 없을 따름이다.

 

 

2)리,기설의 발전주돈이는 음양오행을 기로 보았다. 그에 비해 장재는 '유'는 모두 '기'로 파악한다. '유'는 표상을 가지고 있다. 곧 기가 모인 상테이다. 그러나 기가 흩어진 상태는 '무'가 아니다. 장제는 그것을 '태허'라고 한다. 일기가 흩어져서 아직 모이지 않았을 때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기 중에는 음양의 두 가지 성질이 있기 때문에 만무을 화생할 수 있다. 일기와 음양의 두 가지 성질은 서로 체용이 된다.따라서 리는 천의 리이다. 천과 리는 이명동의어인 것이다. 또 천의 리를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곧 도이다. 이정은 여러 곳에서 천, 리,

 

 

 

자연의 이명동의어로서 도 범주를 사용한다. 리와 천, 도, 자연이 모두 이명동의어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정은 또 리, 천, 도가 모두 형이상이며, 음양과 기는 형이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정의 사상체계에서 중요한 것은 기가 아니라 리이다.

 

 

 

3) 리기설의 집대성형이상의 리는 형이하의 기-음양오행을 통해서 나타난다. 따라서 음양오행은 단지 리의 표현일 뿐이다. '리' '기' '질' 에 대한 주희의 이러한 학설의 연원이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역워건착도]의 우주발생론이다. 주희는 [역위건착도]의 기(태초), 형체(태시), 질(태소)이라는 세가지 상태를 기(음양), 질(오행)이라는 두 가지 상태로 개조한 것이다. 기와 질은 모두 형체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형체는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우주만물은 리기에 의해서 화생되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이나 생명도 리기의 운행에 따라 나타난다. 천도와 인도는 모두 음양오행을 통해 체현된 동일한 리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양자에는 일대일 대응 관계가 성립한다. 따라서 인간의 윤리강상은 우주의 도덕율령이며, 천지의 변화하지 않는 법칙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어길 수는 없다. 리의 세계는 체험세계이며, 대통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는 [홍범], [역전], 추연에서부터 동중서, [회남자]에 이르기 까지 모두 "고찰하면서도 정밀하지 못하고, 논하면서도 상세하지 못한것"이었다. 송대 중엽에 이르러 주돈이가 비록 "성현들의 전해지지 않는 학문을 얻어" [태극도설]을 지었지만 그 설명은 여전히 자세하지 않았다. 이정은 도와 기를 분리시켰고, 주희에 이르러서야 음양오행의 진실한 의미는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드러나게 되었다.

 

 

 

5. '의식'전달의 한계리가 무형한 것이라면 말로 나타낼 수 없다. 말하는 대상은 말할수 있는 것이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형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정은 "리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표상에 의거하여 리를 밝힌다"고 하였다. 주희도 "리는 볼 수 없으니 음양을 통해서야 알 수 있다"거 하였다. 무형의 리(도)가 유형의 기(기,표상)을 통해서 드러난다면 유형의 기를 말함으로써만 리를 밝히고, 도를 알 수 있다.

 

 

이학의 리기설은 이전의 어떠한 학설보다도 명확하고 올바르게 유형한 형이하가 무형한 형이상의 표현임을 서술하였다. 그에 따르면 유형한 사물을 연구함으로써만 무형한 도리를 체잘할 수 있다. 이학가들이 보기에 기의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리가 부착하는 장소이며, 따라서 리를 표현한다는 데 있다. 기가 없으면 리도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말할 수 있는 현상에 대한 서술이 곧 말이며, 체험은 의식이다. [주역], [계사전]에서는 "책은 말을 다 담지 못하고, 말은 의식을 다 담지 못한다"고 하였다. 말에도 한계가 있고, 표상에도 한계가 있으나 의식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인류는 유한한 방법으로써 무한한 체험을 서술하도록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은 의식의 참모습을 더욱 희석시킨다. 의식에서 표상으로, 또 말로의 과정은 '유현함'으로부터 '밝음'으로, '모호함'으로부터 '분명함'으로의 과정이며, 동시에 체험이 점차 암담해지고, 경직화되는 과정이다. 만약 우리들이 말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표상을 볼 수 있다. 또 표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의식을 깨달을 수 있다. 또 표상에 집착하지 않는 다면 의식을 깨달을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선인들의 심층적인 정신 세계를 만날수 있을 것이다. 음양오행으로 만들어진 표상은 체험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다. 표상을 관찰함으로써 그 큰문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이상에서 음양오행설에 대한 각각 다른 관점에서 논한 것을 요약 정리하였다. 음양오행이라는 동일한 설에 대하여 그 인정여부에서부터 접근 방법의 차이까지 다양한 설명에 대해 한편으로는 당혹하기도 하고 음양오행에 의해 구성되어진 한의학의 이론을 근거로 환자를 대해 치료하는 한의학을 공부하는 이로서 이렇게 구구절절 다른 해석을 낳는 학설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 버리기 힘들다. 더우기 이런 다양한 평가를 가진 음양오행학설이 기간의 동양학에서의 위치와 적용을 생각할 때 과연 이 학설이 진리인가 하는 물음에 일순간 답을 잃고 말 지경이다.나는 항상 음양오행설을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과연 음양오행설의 기원은 무엇일까?

 

 

그 시작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발전되었으며 결국한의학에서는 어떤 음양오행설을 받아들인 것인가? 음양오행설을 접한 누구나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이 책에서는 서로 비판하는 가운데 답을 주고 있다.

 

 

초기 중국이 혁명에 성공한 당시의 학자인 양계초의 유물론적 입장에 의한 음양오행설의 기계론적 해석은 당시 관념론적인 동양철학의 잔재를 비판하기 위해 그 모태인 이 학설의 문헌적 비판을 가했다고 하나 너무 문헌 그것도 설문해자나 시,서,역경과 같은 고대의 초기 문헌들을 가지고 아직 발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전된 음양오행설까지 모두 싸잡아 매도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서복관의 통시적 입장에서의 음양오행설에 대한 분석은 음양오행설이 어떤 과정을 겪고 발전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음양오행설이 각각 동양학의 분야에 어떻게 적용되었고 그 결과는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이 미약하고 단순한 문헌적 고찰에 머무른 느낌이 든다.

 

 

곽위의 글은 음양오행설에 나타난 두 가지 편향을 잘 지적하였다. 또한 이러한 편향에 의해 각기 어떻게 다르게 발전했는가를 보여주었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가지 신비주의 경향의 껍질을 벗겼다. 더우기 음양오행설이 이데올로기화 되어 보여 주었던 계급성을 언급하므로 그 영향을 설명하였으나 음양오행설에 대한 비난으로 결론을 맺은 아쉬움이 있다.

 

 

 

풍우란의 글은 변증법과 유물론으로 음양오행설을 해석한 근대 중국의 철학사조의 흐름에 발맞춰 글을 해석하였다. 매우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현재의 중국의 유물관을 대변해주고 있으며 음양오행설에 과학성과 논리성을 부여한 글이다. 비록 지금 음양오행설에 대한 관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만연하여 학문적 발전이 없는 것을 이 글은 변증법적 해석과 더불어 발전의 가능성을 부여한 글이다. 한의학도 이글의 연구 태도를 수용하여 한의학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과 논리적 실증을 겸비해야 할 것이다.

 

 

 

이택후의 글은 음양오행론을 도식화하여 신비주의 경향을 벗고 이것이 음양오행설이 구성된 체계임을 간단히 밝혔다. 이는 음양오행설의 사변적 성향보다는 실용적인 적용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궁철병의 글은 부분적인 음양오행설의 해석으로 보다 심화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인 철학적 패러다임을 적용하여 음양오행설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다.사송령은

 

 

음양오행설의 자세한 발전과정을 싣고 있으나 비교적 관념론에 입각한 글이다. 이는 과거 유학의 정신을 되찾을 것에 촛점을 맞추고 음양오행에 대한 유가적 해석을 고집함으로 음양오행설을 다시 사변의 학설로 만들었다.이러한 다양한 그러면서 서로 대립되는 해석은 음양오행에 대한 자신의 개념화에 도움이 되며 과거의 허무맹랑한 뜬 구름잡기식의 인식을 넘어 보다 구체적인 인지에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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