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史哲

잊혀진 역사 - 북방유목민족사

慈尼 Johnny 2018. 3. 2. 07:35

잊혀진 역사 - 2000대 10만의 라이프니쯔 싸움
"한 눈에 읽어보는 북방유목민족사"

역사란 무엇인가 ?

대학 1학년 때 E.H.Ca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은 적이 있다. 단지 필수 교양도서라기에 또 학회에서 읽으라고 하기에 《철학에세이》와 더불어 아무 생각없이 읽었다. 내용을 요약하라던 선배의 말이 독후감 써오라는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의 말만큼 부담스러웠다. 그때 내가 요약한 《역사란 무엇인가》의 분량은 약 50장 정도였던 것 같다. 대학 2학년 때 E.H.Ca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후배들에게 읽으라고 시켰다. 물론 내용을 요약하라고 했다. 그런후 내 스스로 요약을 해보았다. 2장 내외로 요약이 되었다. 대학 졸업전 E.H.Ca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교양과목에서 배운다는 후배가 찾아왔다. 역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단 한마니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내가 말한 전부였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요지 즉,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라는 뜻은 실증주의 사관의 포기를 의미한다. 실증주의 사관은 고증 제일주의 사관이며 우리를 지금까지도 괴롭히고 있는 식민사관의 다른 말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의 사실 중 증명될 수 있는 사실은 전혀 없다. 내가 1988년 6월 14일에 김치찌게를 먹었는지 누가 증명하겠는가? 10년 전의 일도 증명못하는데 하물며 2000년 전의 일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비석? 무덤? 후세의 조작이 아니라고 누가 증명할 수 있는가? 탄소 연대 측정법의 오차는 1만년의 4000년 정도라고 알고 있다. 거기에 기후 조건 등의 영향으로 몇천년 정도 왔다갔다 한다. 그것이 연대 측정의 단위가 될 수 있는가? 과연 기원전 5세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알 수 있는가?

동양사학에서는 역사를 문학, 철학과 동의어로 보았다. 근대의 서구 사학에서 역사를 과학으로 본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따지지 않겠다. 단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의 논조는 "역사란 실증위주의 과학이 아니라 현재의 자기자신의 철학"인 것이다. 내가 1988년 6월 14일에 김치찌게를 먹었든 안먹었든 나 스스로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과거의 사실이다. 이에 반해 중학교 3학년 때 선생님과 낙시에 가서 나눈 인생의 이야기들(언제인지 어느 낙시터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없던 일일 수도 내가 꿈을 현실로 착각한 사실일 수도 있다.)은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내가 생각하는 정신의 원동력임과 동시에 내 철학의 기조가 되는 과거의 사실이다.

다시 말해 역사란 의미있는 과거의 사실(아닐 수도 있음)인 셈이다. 역사는 객관과 과학과는 거리가 먼 철저한 주관이며 철저한 철학이다.(철학에도 논리는 과학만큼 엄격하다. 단지 전제의 증명이 없을 뿐) 역사서를 볼 때 얼마나 과거의 사실을 정확히 고증하고 증명하는지를 보지 말라. 내가 1988년 6월 14일에 김치찌게를 먹었는 둥 루비콘강을 주사위 파는 행상아줌마가 건너갔다는 둥 고려 공민왕 9년에 평남에서 우박이 내렸다는 둥 쓸데없는 사실일 증명하면 뭐하겠는가? 단지 저자가 얼마나 철저히 주관적이고 논리적인가를 보라. 얼마나 자신의 철학을 역사를 통해 펼쳐나가는가를 보라. 그것이 역사를 보는 바른 관점이다.

인류사

이제부터 인류사에 대해 좀 이야기 해보겠다. 인류사는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투쟁사이다.(이게 왜 증명이 필요없는지는 위에서 다 이야기했다.) 세계사는 유목민족을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족속들이라고 얘기한다. 애써 가꾼 농경지와 문명을 파괴한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현재의 세계사는 농경민족 위주의 사관으로 농경민족의 철학이 반영된 세계사이다. 한번쯤은 유목민족의 입장에서 세계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세계문명의 발상지라는 것 자체도 농경민족적인 발상이고 세계사의 주인공이었던 사람들 역시 농경민족이었다. 그렇게 유목민족이 보잘것 없고 형편없는 족속들이었나? 왜 그렇게 보잘것 없고 형편없는 족속들을 수천년에 걸쳐 무서워하고 두려워 하였던가? 그보다 앞서 짚고 넘어갈 것이 우리 민족은 농경민족인가? 라는 것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라고도 한다. 가뭄과 흉년이 최고의 재앙이다. 얼핏보면 농경민족인 것 같다. 어디선가 국사책에서도 그렇게 쓰여있는 것 같다.

농경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가축은 소이다. 물론 유목민족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우마(牛馬)와 마소, 하나는 정통 농경민족인 한족(漢族)의 말이고 또 하나는 순 우리말이다. 비약이 심한가? 그럼 비약좀 더 해야 겠다. 말벌은 아주 큰 벌이다. 말보단 소가 더 큰거 같은데... 나중에 한자의 영향으로 바뀐 말이 왕벌이다. 신라 시대의 왕을 마립간이라고 부른것이나, 마니산이나 다 연관이 있다. 말만한 처녀라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에 대해서 오해하는 사람이 꽤 있는 것 같은데 처녀가 커서 말만하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유목민족 특히 몽고 지방의 결혼은 말과 처녀를 바꾸는 행사이다. 총각이 자신의 가장 아끼는 말을 가지고 처녀의 집에 가서 처녀랑 바꿔온다. 그것이 결혼이다. 말만한 처녀는 "말과 바꿀만한 처녀", 혼인 적년기의 처녀란 뜻이다.

유목민족은 흰색을 좋아한다. 우리를 백의민족이라고 하는데 몽고나 우즈베키스탄에 가보라. 전부 백의민족이다. 가축을 데리고 겨울을 나는 방식은 단순무식하다. 가을까지 실컷 먹여 피둥피둥 살을 찌운 후 겨우 내내 굶긴다. 그리고 겨울이 지난 첫 싹이 나는곳은 겨우내내 눈이 쌓인 흰머리산[백두산;白頭山] 기슭이다. 겨울에 내린 눈이 녹아 그 산의 기슭에서 첫 싹이 돋아 겨우내내 아사 직전의 가축들이 기사회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흰색을 성스러운 색으로 숭상하고 백두산(白頭山;고유명사 아님)을 성산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농경민족의 경작지는 유목지보다 남쪽에 위치한다. 그리고 농경민족들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유목민족의 눈에는 유목지가 삶의 터전이고 가축의 생명이지만 농경민족의 눈에는 단순한 황무지이다. 점차 늘어나는 인구에 개척과 개간이라는 미명으로 황무지는 점점 농경지가 된다. 논이 생기고, 밭이 생기고 도시가 세워지고 길이 닦인다. 어느 순간에 유목지는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고 가축들이 떼죽을을 당하게 된다. 가축의 수를 줄어드는 유목지에 맞춰 줄이지 않는 이상 가축 100마리 키울 유목지가 60마리 키울 유목지로 바뀌면 40마리만 죽는게 아니고 100마리가 다 죽는다. 그러한 순간에 유목민족의 영웅이 나타난다. 그리고 흩어져 있던 유목민족을 단결시켜 농경민족을 공격한다. 백전백승. 순식간에 수십, 수백년에 걸쳐 개간했던 농경지와 도시들은 파괴되어 초토화(焦土化) 된다. 수많은 농경민족이 학살되며 몇세기를 가꿔왔던 문명이 파괴되어 유목지로 바뀐다. 당연히 농경민족은 유목민족을 두려워하며 야만적이고 무식한 족속이라 자위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한 역사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숨기고 축소시킨다. 그리고 걸러져 남은 것이 바로 우리가 배운 세계사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목민족사를 보고 놀랜다. 어떻게 이들에게 이러한 문명이 있었고, 이렇게 세련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문화유산이 왜 주인도 모르고 감춰지고 축소되어 왔는지.

훈족

HUN이란 족속이 있었다. 지금부터 한 2000여년 전의 족속들이다. 동양에선 흉노(匈奴)라고 불렀다. 오히려 흉노보단 HUN이 그들 족속의 이름으로 더 맞을 것이다. HUN은 사람을 뜻한다는 설과 하늘을 뜻한다는 설이 팽팽히 맞서 있다. 한민족(韓民族)의 한(韓)이 무엇인가와도 연관이 있을 법도 하다. 동양의 중국사에서 훈족의 역사를 축소 왜곡 은폐시키는데 급급했듯이 서양사에서의 훈족도 축소 은폐 왜곡되어 왔다. 두려운 유목민족을 가급적 역사속에 나타내지 않으려는 농경민족의 간절한 모습이다. 하지만 농경민족보단 유목민족에 가까운 우리민족에게 훈족은 적어도 사촌만큼 가까운 민족이고 우리까지 그들을 야만스럽고 별거 아닌 대상으로 축소시켜선 안된다. 어짜피 없애려고 마음먹은 역사가 자세히 살펴본다고 살아날리 없다. 하지만 몇몇의 사실에서 유추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첫째, Hungary라는 나라가 아직도 존재한다. 헝가리가 아닌 훈가리이다. 영어식으로 발음할 필요없다. gary는 몽고어로 나라를 뜻한다. 불가리아의 가리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드라큘라라는 서양 최고의 귀신이 있다. 이 귀신책의 첫 장에 보면 "드라큘라는 루마니아의 어쩌고 저쩌고 백작이며 훈족의 자손이다"라고 되어 있다. 되게 무서우라고 적어논 글이다. 또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이 드라큘라라는 귀신이 제일 싫어하는게 마늘과 십자가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기독교 사회의 중세유럽에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마늘을 무서워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마늘냄새가 지독해서? 그런다고 그 무시무시한 귀신을 이겨? 이점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았는가?

『슈퍼맨』이란 영화가 있다. 엄청 Ultra하고 Powerful한 사나이가 종횡무진 까불고 다닌다는 이야기이다. 이 슈퍼맨이 안타깝게도 한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자기 고향의 돌, 클립톤 행성의 돌만 보면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둘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아무리 강력한 슈퍼맨이라도 자기 고향에서는 보통사람인 것이다. 자기 고향의 상징을 갖다대면 아~ 난 보통이구나 하고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무시무시한 귀신 드라큘라라도 훈족의 자손이라고 언급한 이상 진짜 훈족 앞에서는 박쥐 흉내나 내는 보통에 불과하다. 이 훈족의 상징이 바로 마늘인 것이다. 전세계 많은 민족이 있으나 내가 알기로 마늘을 자기 민족의 상징으로 내세울 만한 민족은 한민족(韓民族) 밖에 없다. 가장 가까운 중국과 일본도 생마늘을 마구 먹지는 못한다. 그리고 단군신화의 곰이 먹던 마늘 얘기를 꺼내어 봤자 사족에 불과할 것이다. 국사책에서 감자가 몇세기에 수입되었고 하는 따위의 쓸데없는 시험에서 제외되는 유일한 품목이 마늘이다. 우리민족의 상징되는 음식은 김치, 불고기가 아닌 마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점 때문이라도 훈족과 우리민족 사이의 마늘을 가지고 고민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세째로, 훈족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유발시킨 원인이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연구하는 많은 사학자들의 "왜 게르만족이 이동하였을까?"에 대한 결론은 바로 공포(恐怖)였다. 기상이변 어쩌고 하는 학자들도 한번 더 생각해보면 기상이변이 게르만족에게 들이닥친 것이 아니고 훈족에게 들이닥쳤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인원 2000만명이란 엄청난 숫자가 한꺼번에 이동하였고 그 이유는 바로 훈족에 대한 공포였던 것이다. 공포에 질려 도망가다 앞에 걸리적거리는 로마라는 나라를 멸망시켜 버린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고... 원탁의 기사라는 아주 멋진 기사도를 다룬 소설이 있다. 백전백승 임전무퇴의 아더왕이 왜 흑기사만 만나면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도망을 가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아참, 흑기사는 얼굴이 검은 흑인기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드라큘라처럼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검은 망토를 걸친 기사를 말한다.

네째, 시계 이름으로 유명한 Odin이란 말을 들은적이 있을 것이다. 게르만족의 고대신이다. 무지무지하게 힘이 세고 번개로 사람을 막 때려죽이고, 거인신들을 몰살한 무시무시한 신이다. 스칸디나비아 신화같은데 보면 자주 등장하는 신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인 여호와의 반대신이 사탄이란 것은 잘 알것이다. 부처님을 매일 괴롭히던 악신이 아수라라는 것도 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뭐 게르만족의 신을 알아서 뭐하겠냐마는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Odin의 상대신, 아주 악하고 성격 드럽고 사람들 죽이기를 재미로 하는 악신이 존재한다. 그 악신이 바로 Atilla이다. 게르만족 신화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Atilla는 실존인물로서 훈족의 대왕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으면 Odin과 같은 레벨의 악신으로 꼽았겠는가.

심연의 상처

이 네가지 점에서 볼 때 훈족이 얼마나 서양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족속이었는지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감추고 왜곡해 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더이상의 훈족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위의 네가지 사실만으로도 훈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을 아직도 무서워한다. 아니 동양인 자체를 무서워한다기 보다 눈이 가늘게 찢어지고 치켜올라간 모습을 무서워한다. 어떤 서양인(누군지 모름, 알 필요 없음)이 쓴 "서양인의 심리상태"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 보면 서양인이 누군가를 겁줄 때 짓는 표정이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이라고 쓰여있었다. 예로 몇가지 들어놓은 것이 "터미네이터"와 "대부"였다. 아놀드가 경찰들 겁주고 총 막 쏘고 다닐 때의 표정을 생각해 보라. 대부의 돈 어쩌고가 상대편 죽이기 전의 표정을 생각해 보라. 어찌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란 영화를 본적이 있다. 참 슬픈 우리 현대사의 아픈 이야기였다. 영화를 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거기에 수잔은 입양아로 나온다. 그리고 양부모에게 매우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양엄마가 막 때린다. 그 이유는 "무섭다"라는 것이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애를 빗자루로 마구마구 때리며 무섭다고 울부짖는다. 아이의 눈이 가늘고 위로 찢어져 올라갔다는 점 때문이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니까 믿을만 할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훈족이 남긴 그들 심연의 상처이다. 왜곡시키고 소멸시킨 역사이지만 그들의 잠재의식 속엔 아직도 자신의 선조를 공포에 떨며 대이동시킨 훈족의 영상이 남아있는 것이다.

몽고

훈족이 어떻게 전투했고 어떤 방법으로 서양인들의 공포심을 유발시켰는가는 상당히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 서적은 없다. 단지 훈족과 비슷하고 유일하게 서양을 침략한 몽고의 제베군의 전투사를 보며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징기스칸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정복(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따위 쪼다들 말고)을 이루었을 때의 그 총 병력이 8만명이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유럽을 또다시 훈족의 부활로 공포에 떨게 만들고 유럽 최강의 세력이었던 폴란드를 초토화시키고 라이프니쯔에서 연합군 기사 10만명을 몰살시킨 제베군의 총 병력이 2000명이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실이었다. 몽고군이 서양에 쳐들어간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맨 처음 몽고의 징기스칸이 가진 목적은 딱 두가지였다. 한가지는 몽고의 통일이었으며 또 한가지는 비참하게 죽은 자기 아버지의 복수였다. 이 푸른 늑대는 이 두가지만을 위하여 전 세계를 헤집고 다니게 된다. 첫번째 목표는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금의 이간질책 덕에 나름대로 애를 먹었지만 두번째 목표에 비해서는 쉬웠다. 하지만 두번째 목표는 상당히 어려웠다. 원수가 도망다니는 길을 쫓아다니며 정복한 곳이 오늘날 우리가 사회과 부도에서 감탄하는 몽고의 영토이다. 이 원수가 처음에 서하로 도망치게 된다. 서하에 침략한 징기스칸이 좋게 말할때 내놓으라 하니까 서하가 싫단다. 그래서 서하를 멸망시키고 지금까지도 그 땅의 유물이 땅을 몇십 미터나 파내려가야 어쩌다 하나 나올 정도로 초토화시킨다. 그 원수가 그 다음에 도망친 곳이 인도였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은 징기스칸에게 하나의 전령이 도착한다. 그 원수가 인도가 아닌 아랍으로 도망쳤단다. 인도는 살았고 아랍은 죽었다 이제. 아랍의 호라즘 왕국으로 쫓아간 징기스칸에게 호라즘 국왕은 웃기지 말란다. 어디서 굴러먹은 개뼉다귀냐는 욕설과 함께 징기스칸의 사신을 죽인다. 그리고 호라즘 또한 초토화된다. 초토화란 말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없다. 그냥 유목지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땅의 모든 생명체를 다 죽이고, 모든 인공적인 것들(건축물, 논, 밭 등)을 전부 갈아(기록에는 벽돌 한장까지 다 갈았다고 되어 있다.) 흙밭으로 만든다. 이것이 초토화이다. 조금은 겁이 나는 말이기도 하다.

징기스칸 군대가 이용한 최대의 무기는 공포(恐怖)였다. 적에게 분노를 주지않고 공포를 주는 것이다. 침략해서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행위는 적에게 공포를 주지않고 분노만 심어준다. 하지만 몽고군 1명당 8만명 꼴의 대학살을 하는 중에도 약탈과 강간이 없었다는 사실은 적에게 사람이 아닌 마귀들이라는 무시무시한 공포감만 심어줄 뿐 감히 저항할 생각이 들지않는 것이다. 또 한가지 징기스칸 군대의 무기는 민심(民心)이었다. 항복한 성에 진출해서는 일체의 약탈이 없었다. 유목민족인 징기스칸 군대가 정복당한 농경민들의 추수를 돕는다. 다음 차례의 적들이 선택할 길은 두가지 뿐이다. 반항하여 초토화되느냐 항복하여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살 수 있느냐이다. 대부분의 다음 차례 적들이 항복하였다.

아랍 끝 지금의 터키까지 도망친 원수는 끝내 병사한다. 징기스칸은 속이 상해 울어버린다. 그런 징기스칸에게 교황의 친서가 왔다.(그 당시는 십자군 원정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직후였다. 유럽의 제국가들은 무지무지하게 단결이 잘되고 교황의 권의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우리 공통의 적 아랍을 함께 무찌릅시다" 라는 내용이었다. 징기스칸은 "병신 지랄하네"로 일축해버린다. 아랍을 무찌를 이유도 없지만 너네가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다. 다시 고국으로 후퇴하던 징기스칸에게 사신이 온다. 러시아의 레지스탕스가 보낸 사신이다.(《대장 불리바》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당시 러시아는 폴란드의 식민지였음) 온김에 우리좀 독립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징기스칸이 OK 한다. 그리고 제베에게 2000명의 군대를 딸려 보낸다.

「2000 대 10만」의 라이프니쯔 싸움

폴란드가 초토화되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독립되었다. 전 유럽이 경악했다. 유럽 최강국 폴란드가 2000명에게 풀밭으로 변하다니... 긴급 소집한 각국의 대표들은 다시 한번 십자군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각국에서 기사 10만명을 소집하였다.(봉건제도를 보면 기사가 영주 다음 계급이다. 기사 10만명이라면 졸(卒)들까지 치면 100만도 훨씬 넘는 대군일 것이다.) 현재의 독일 라이프니쯔에서 기사 10만명 VS 몽고 기병 2000명의 전쟁이 벌어진다. 결과는 기사 10만명의 소리없는 증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전쟁이었다. 찍소리 한번 못하고 증발한 기사 10만명 때문에 유럽의 역사는 수치스러운 나머지 라이프니쯔 전쟁을 감추고 숨겼다. 불행중 다행으로 제베군도 러시아에서 눌러 살았지 맨날 비오고 축축한 서유럽은 별 관심이 없었다. 예전의 훈족이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 2000명이 10만명을 이겼을까? 1대 50의 싸움인데. 아니 졸(卒)까지 치면 훨씬 더했을 텐데. 그 해답은 기사의 갑옷과 국궁에 있다. 몽고군의 세번째 무기는 국궁이었다. 국궁이라니까 우리나라 화랑의 활 같은데 국궁은 화랑만 사용하던 것이 아니고 고구려, 말갈, 몽고 모두 사용한 활이었다. 양궁은 나무로 만든다. 국궁은 사슴뿔로 만든다. 또 양궁은 시위를 실로 단다. 국궁은 시위가 사슴 힘줄이다. 왠만한 사람은 국궁을 당기지도 못한다. 그 사람도 양궁은 당긴다. 딱 양궁과 국궁의 파괴력은 4배 차이가 난다. 이것이 국궁의 비밀이다. 기사의 쇠갑옷은 양궁에 맞아도 끄떡없을 정도의 두께로 제작된다. 그거보다 무겁게 만들면 걔들이 바보게? 하지만 국궁에 맞으면 끄떡하는 정도가 아니고 관통되어 죽는다.

라이프니쯔의 기사들은 쇠갑옷을 입고 말들에게 까지도 쇠갑옷을 입었다. 하지만 몽고 기병들은 무기외엔 쇠붙이가 없는(심지어 안장까지도 없다.) 경기병들이었다. 기동력에서 차이가 나고 또 몽고기병들은 기사(騎射)에 능했다. --- 음. 기사(騎射)란 춘추전국 시대에 연나라가 도입해야 겠다고 한참 싸우고 난리친 대목이다. 말타고 활쏘기인 것이다. 우리나라 무과시험에 말타고 활쏘기를 보았다는 사실은 다들 알 것이다. 그런데 말타기 따로 활쏘기 따로가 아니고 멀티테스킹을 시험보았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말위에서 쏜 화살이 과녁에 맞춘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현대 뒤떨어진 우리 후세의 생각이고 그때엔 정말로 했다. 이쯤에서 몽고군의 말에 안장이 없는 이유를 설명해야겠다. 기사(騎射)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약점은 있다. 바로 오른편의 적을 쏠 수 없다는 것이다.(오른손잡이일 경우에) 이 경우 두가지 방법이 있다. 말 배밑으로 기어들어가 말에 매달린채로 쏘는 방법과 말을 순간적으로 뒤집어 타서 쏘는 방법이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개인의 취향이지만 안장이 있으면 걸리적거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안장없이도 말타는데 익숙한 사람들이 뭣하는데 걸리적거리기만 한 안장을 매다는가?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도 기사(騎射)가 나온다. 고등학교 국사책 표지에 있다. 몽고 뿐 아니라 우리도 그런거 잘했다는 말이다. --- 몽고군의 전술은 단순했다. 기사 10만명을 가운데에 몰아넣고 2천명이 전속력으로 주위를 돌며 가운데에 활을 쏘아넣는 것이다. 10만명이 증발할 때까지... 섬찟한 면도 없지 않지만 부드러운 전쟁이란 없는 법이니까. 몽고군이 유목민족들 중 특별히 강한 족속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그냥 평균적인 유목민족이었을 것이다. 말갈족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 아골타는 이렇다할 원수가 없기 때문에 귀찮게 이리저리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청나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구려, 발해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구려

고구려 얘기를 잠깐만 해보자 나온김에. 1970년대까지 고대 투르크 문자가 해독되지 않고 있었다.(투르크가 돌궐이란걸 몰랐던 사람을 위해 설명한다. 오스만 투르크, 쉘주크 투르크 다 서요(西遼)라는 나라의 기반을 둔 아랍의 나라이다. 서요(西遼)는 금나라에게 박살나고 도망친 거란 요나라의 잔당들이다. 아, 그리고 Turkey 또한 투르크의 나라이다. 터키의 전통음식이 곰탕이라고 놀라지 말라.) 1970년대 드디어 돌궐문자가 해독이 되고 돌궐비문을 열심히 해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우디아라비아 사막 한가운데에서 발견된 돌궐비문에 고주몽이라는 이름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국사책에 있는 고구려 최대 판도라고 그려논 그림은 머리속에서 지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목민족에게는 국경이라는 개념이 없다. 유목민족의 판도를 잡은 민족은 아랍에서 만주까지의 유목지가 다 같은 땅이다. 고구려는 제국이었다. 말갈, 돌궐 등의 민족들이 고구려를 이루고 있는 민족들이었다. 발해가 세워지자 돌궐이 발해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도 당연한 기록이다.

말갈

이제 말갈 이야기를 할 것이다. 훈족도 특별이 관심있는 족이지만 너무 오래되어 알아내기 힘든 민족이다. 하지만 말갈은 아니다. 다들 말갈이 오랑캐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첫머리에 실증주의 사관을 잠시 얘기했다. 그러면서 역사는 철학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역사가 철학이라고 했지 상식이나 종교는 절대 아니다. 철학과 과학의 공통점은 논리적인 전개이며 틀린점은 전제의 증명 여부이다. 역사의 전제는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철학이지만 상식적으로 이거다 저거다 단정짓는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식민사관에서는 "삼국 시대"란 말이 없다. "이국 시대"였다. 고조선의 역사는 아예 없고, 고구려, 발해, 요, 금, 청의 역사는 전부 만주사로 따로 취급하였다. 논리적이다. 지금의 역사보다 훨씬... 지금의 역사는 고구려, 발해까지 우리 역사에 편입하면서 요, 금, 청은 만주사, 중국사에 넣고 있다. 비논리적이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와 신라가 전쟁을 하는 대목이 있다. 고대의 전쟁은 사기(士氣) 싸움이고 선봉 부대가 적의 선봉부대를 얼마큼 화려하게 무찌르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그래서 선봉부대는 최정예 부대를 선출한다. 신라의 선봉부대는 아시다시피 화랑부대였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화랑이 아니고 고구려의 선봉부대이다. 바로 말갈부대였다. 오랑캐 부대를 선봉에 세우는 고대국가는 없었다. 질려고 작정한 나라가 아니면 귀족의 자제나 핵심계층의 젊은이들을 선봉에 세웠다. 말갈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고 고구려의 지배계층의 고유명사였던 것이다. 화랑족이란 말만큼 말갈족도 우스운 말이다. 발해를 세운 사람들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라고 국사책에 나와있더라. 그건 국사책이 아니고 개그책이다. 고구려 유민=말갈족이다. 오랑캐랑 세운 나라가 200여년 동안 독립국가로 존립할 수 있었는가? 무슨 우리가 미국이나 스위스 쯤 되는줄 아는가? 발해가 지방자치제가 잘 발달된 연방국가라고 생각하는가?

발해가 망한뒤 만주에서 무려 300년이 넘도록 독립운동이 일어난다. 전세계 역사상 그렇게 치열하게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역과 시대는 발해가 망하고 금이 일어서기까지의 300여년의 만주말고는 단언코 없다. 연간 수백회의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의 기치는 다 동일하다. "발해의 부고(復古)"였다. 요나라는 거의 만주의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이 때 일어난 인물이 아골타이다. 이름이 오랑캐스럽다고 오랑캐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아"라는 성씨는 엄청나게 많다. 아사녀, 아비지 등등... 그리고 우리는 난생신화를 가진 민족이다. "알". 박혁거세, 고주몽, 김알지 등은 알에서 나왔고 김수로, 석탈해는 "金궤짝"에서 나왔다.

여담이다. 박(朴)자는 순박할 박(朴), 후박나무 박(朴)이라고 옥편에 나와있지만 원래는 알 박(朴)이다. 수박, 호박이나 흥부타령의 박 또한 다 박(朴)이다. 둥근 구(求)모양을 박이라 칭했다. 또한 알타이 어로 알은 금(金)을 뜻한다. 의심가는 사람은 지도책을 펴보라. 알타이산맥이 금대(金帶)산맥이라고 쓰여져 있다. 어찌보면 신라의 삼성씨 박, 석, 김이 다 "알"이란 것을 한자로 훈차하거나 알타이어 훈차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음차는? 아(阿)나 아(兒) 정도 밖에 더 있는가? 원래 중국어의 "ㄹ"은 L보다는 R에 가까워서 알(謁)같은 문자를 쓰지는 못한다. HUN의 Atilla나 금의 아골타, 요나라의 아보기 등이 다 비슷한 성을 쓴 인물일 것이다.

각설하고 아골타가 금을 세울 때의 기치는 "발해의 부고(復古)"였다. 당연히 복수를 수반한 부고(復古)였다. 그런데 이 중국의 송(宋)이란 나라가 이이제이(以夷制夷) 외교정책으로 금이 강해지니까 요의 편을 드는 것이었다. 요를 멸망시키고 내친김에 송나라 황제를 잡아 죽인다. 이때가 북금남송 시대이다.

금의 말갈족이 오랑캐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아골타의 고향은 지금의 함경북도 무산지역이다. 동북아시아의 유일한 노천철광석 지대이고 철기 시대의 시작이 여기부터라고 짐작되는 지역이다. 백두산의 동쪽기슭이며 단군신화의 태백산 기슭 아사달이란 지명의 현위치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 무산 지역의 말갈족을 흑수말갈이라 불렀다. 흑수는 천지(天池)를 뜻한다. 왜 천지가 흑수(黑水)냐고 물으면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한번 보라고 밖에 말을 못하겠다. 물이 너무 맑으면 검푸른 빛깔이 되더라. 금사(金史)라는 책이 있다. 송나라의 책이다. 예전의 중국 역사서는 이전 나라가 망한 후에 기록되는 것이 정식이다. 금나라가 송나라보다 먼저 망했기 때문에 금사는 송나라에서 지어졌다. 이 책에 말갈과 아골타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반농반목의 민족이며 고주몽의 후손이고, 특히 백두산 기슭에서 거하는 족을 흑수말갈이라고 한다고 되어 있다. 생활습성을 기록해 둔 곳도 있다. 마늘과 염지를 즐겨먹고, 온돌생활을 한다고 되어 있다. 염지란 고등학교 때 국사공부 열심히 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고추가 들어오기 전의 김치 즉, 소금에 절인 채소들을 말한다.

이게 오랑캐인가? 단지 우리민족으로 보기엔 중국을 제패한 너무 부담스러운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다. 심심한 사람들은 병자호란에 대한 책을 보라. 임진왜란과 비교해서 보라. 악의를 가진 유학자들이 쓴 책 말고 야담도 좋고 중국책도 좋다. 동질성이 많이 사라졌긴 해도 오랑캐와의 전쟁은 아니었다. 광해군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고민해 보라. 지금은 말도 틀리고 풍습도 틀려졌다. 점점 더 이민족이 되고 있긴 하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언젠가 민족이 무엇인가에 고민해본 적이 있다. 말이 같고 생활풍습이 같고 핏줄이 같아야 민족이라고들 생각할 것이다. 핏줄이 같다는건 변별점을 잃은 구별이다. 나머지 말, 생활풍습은 큰 변별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비교해 보자. 일제 시대에 하와이로 팔려간 조선인의 3세가 지금 미국에서 살고있다. 우리말를 전혀 못하고 할머니 어머니가 다 미국여자인 관계로 핏줄의 호환성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조국을 늘 그리워 한다. 자기의 조상의 핏줄인 한반도의 일가를 친척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사람은 우리민족인가 아닌가? 또 다른 사람이 있다. 역으로 우리나라에 사는 화교들 예를 들겠다. 나름대로 핏줄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지만 사랑에 국경이 어디있는가? 우리나라 여자랑 결혼하고 2세 3세가 되었다. 그 3세는 항상 자신을 한족(漢族)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우리말도 잘하고 김치도 잘 먹는다. 이 사람은 중국의 자기 핏줄을 생각하고 친척이라고 느낀다.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인가 아닌가?

난 하와이 3세를 더 우리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고민을 통해 얻은 결론은 민족이란 공통된 조상을 둔 그 조상이 자기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피가 섞이든 말이 안통하든 말이다. (물론 그 점들이 공통된 조상이라는 느낌에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민족에 역사에서는 공통된 조상 단군도 좋고 고주몽도 좋다. 어째튼 같은 조상을 느끼는 사람들이 바로 같은 민족이 아닌가? 누가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하는가? 여진족과 내가 공통된 조상에서 파생된 친척관계인데, 말이 안통하면 오랑캐인가? 조선 시대의 유학적 생활풍슴을 따르지 않으면 야만스런 오랑캐인가?

고려 시대의 왕건이 발해 유민을 받아들일 때 말갈인 한사람이 왔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있다. 왕건에게 예의를 차리는데 왕건이 괘씸하게 생각했다. 왕에 대한 예우는 9배를 하는 것인데 그대는 왜 3배만 하는가? 라고 묻자 주위에 있던 시중(누군지 모름, 시중은 지금의 국무총리)이 "전하 저 사람은 정확헤게 우리민족의 옛 풍습을 따랐습니다." 라고 했다. 그렇다. 그런 중국식의 생활풍습에 젖은 우리가 오히려 오랑캐가 아닌가? 세종 때 여진족의 귀화를 장려했단다.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귀화시키고, 고려가 발해 유민의 귀화를 장려시켜 정통성을 확립하려 한것과 동일한 의미로 보면 비약인가? 비약일지는 몰라도 왜인에 대한 정책과는 분명히 차별이 있었다.

얘기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거란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단 거란은 우리에게 말갈과 다른 의미라는 얘기는 해두겠다. 고려 시대의 큰 전쟁은 두번 일어났다. 첫째가 거란전이고 둘째가 몽고전이다. 금은 그 사이의 나라이다. 거란과 몽고와의 싸움은 정말 굉장한 항전이었다. 금과는 왜 안싸웠을까? 형제국에서 신하국으로 강등되는 와중에도 끝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란과 몽고에게 금에게 들어줬던 것의 반만 들어줬어도 전쟁이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이것은 역사의 가정이 아니다. 이유를 생각하자는 것 뿐이지...)

고려 시인 진화의 〈봉사입금(奉事入金)〉이란 유명한 시가 있다. 국사책에서는 엄청난 민족적 자각이라느니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자는 뜻이라느니 하지만 절대 아닐것이다. 심심한 사람은 그 시도 원문으로 찾아보라. 왜 아닌가. 실증을 한 대목은 전혀 없었다. 삼국사기나 금사를 인용한 것도 실증은 아니다. 그런 후대에 지어진 책을 어떻게 믿겠는가? 이 점에서 내 얘기가 별 신빙성이 없어보이기도 할 것이 다. 하지만 유목민족으로서의 우리 민족의 자각과 잊혀진 또다른 역사의 뒤안길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은 다시 한번 강조하겠다.
*글, 박진철